직장인 L(34)씨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발신 번호는 02-736-023. 전화를 받은 L씨. 때뜸 상대방이 “서대문 경찰서 입니다. L씨 맞나요?”라고 질문을 한다.
맞으니 맞다고 말한 L씨.
이후 전화 수화기를 통해 L씨가 현재 살고 있는 집 주소를 정확히 번지수까지 언급하며 댄다.
그리고는 “왜 경찰 출두 요구서를 두번이나 보냈는데요. 안오셔서 이렇게 전화 드렸습니다”라는 말이 이어졌다.
출두서를 받은 적이 없는 황당한 L씨가 질문한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서대문경찰서 류기현 경장입니다. L님 국민은행 계좌번호 000-000-000-00가 대포통장으로 이용되었네요. 혹시 박형준씨라고 아나요?”
화들짝 놀란 L씨. L씨의 정확한 국민은행 계좌를 알고 있는 목소리가 겁난다.
L씨는 “저기 그런데 박형준이라는 사람은 처음 듣는 이름인데...”라고 말한다.
또 전화 수화기에서의 목소리.
“대포통장으로 거래가 많이 이뤄 졌네요. 박현준을 붙잡고 보니 L씨 통장과 신분증이 있어서요. 전혀 모르시나요? 경찰서로 한번 나오셔야겠는데. 언제 시간되시나요?”
너무 꽉 맞춰진 듯한 수화기 건너에서 쏟아지는 목소리.
L씨는 “점심 시간에 갈 수 있다”며 “전화하신 분 이름 전화번호 알려주시겠어요?”라고 물었다.
이내 “02-3150-2269구요. 류기현 경장입니다. 서대문경찰서 2층 수사 2계로 오세요”라는 말도 이어졌다.
전화를 끊은 L씨. 못내 찜찜했다.
이후 L씨는 02-3150-2269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02-3150-2269은 보이스 피싱으로 등록돼 있다는 멘트가 떴다.
어이가 없어진 L씨.
그런데 5분 정도 후 다시 전화가 온다.
“서대문서 류기현 경장입니다”
호기가 발동한 L씨가 “네. 저 지금 경찰서로 가고 있는데요”라고 말하자, 수화기에서 “다름이 아니라 오늘 경찰서로 오시는 피해자분들이 많아서 오후에 나오셔야겠는데요”라고 말한다.
L씨 “예 그러죠. 그런데 뭐 하나만 물어보죠. 혹시 류기현 경장 확실한가요?”라고.
수화기 넘어 목소리 “그런데요”다.
L씨가 “서대문서에 전화하니 그런분 없다던데요”라고 말하자 갑자기 끓어지는 전화기.
L씨는 기자에게 “보이스피싱이 이렇게 치밀하고 정확히 타격하는지 몰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은행 계좌 비밀번호를 바꾸기 위해 은행에 들린 L씨는 은행 직원에게 더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요즘 계좌번호는 물론 계좌 거래 내역까지 알고 전화하는 신종 보이스 피싱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르신들이 사기범들에 속아 하루에도 몇 차례 은행을 찾아 비밀번호를 변경하고 문의를 한다는 것.
여기에 경찰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효과음까지 넣는 경우도 많다는 게 피해자들의 설명이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 신종 보이스 피싱 수법이 교묘하게 변종돼 선의의 피해자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며 “일단 경찰이나 검찰 등에서 직접 전화해 출두해 달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전화가 오면 그냥 무시하고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병국 기자/coo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