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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형석의 상상력사전> 용서
두 모정이 만났다. 한 자식은 죽었고, 한 아들은 살아남아 죗값을 치르고 있다. 피해자의 어머니와 가해자의 어머니. 한 방에 마주앉았지만 둘 모두 눈을 마땅히 둘 데가 없고, 입은 열었지만 말은 길을 잃고 그저 머리와 허공만을 맴돌 뿐이다. 지난달 25일 방영된 SBS스페셜 다큐멘터리 ‘기적의 하모니’의 한 장면이다. 한때의 실수로 수감 중인 청년들이 유명 가수의 지휘 아래 합창 무대에 서는 과정을 그린 프로그램 속 한 소년범의 사례였다.

애써 외면하려 해도 가슴 아픈 풍경이 자꾸 눈에 걸린다. TV에서도, 신문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잔인하고 슬픈 일들이 너무 많다. 한 중학생이 친구들로부터 끔찍한 괴롭힘을 당하다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 “아직은 만날 준비가 안 됐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며 오열하는 부모와 “어떻게든 만나서 사죄하고 싶다”며 고개를 떨구는 또 다른 부모. 종교나 문학 같은 상징 혹은 허구가 쉽게 끌어안았던 ‘속죄’와 ‘용서’라는 말은 오히려 현실이 될수록 자꾸 밀려 달아난다. 혹은 너무 무겁고 버거워 입 밖에 내는 것조차, 그 끝자락을 잡는 것조차 죄스러워진다.

‘아들’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벨기에의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 형제 감독의 작품이다. 목수인 중년의 남자는 청소년범들의 재활을 맡아 목공을 가르치며 살아간다. 그가 어느 날 고민 끝에 한 소년을 교육생으로 받는다. 중년의 사내가 헤어진 부인에게 하는 말을 통해 소년의 정체가 드러난다. 남자는 5년 전 끔찍한 사건으로 아들을 잃었고, 소년이 살해범이었다. 사실을 알면서도 남자는 왜 소년을 받아들였을까. 영화는 남자의 뒤통수와 얼굴을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따라가며 원한과 연민, 그 어느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혼돈 속으로 관객들을 안내한다. 영문을 전혀 모르는 소년은 자신이 아무 데도 의지할 데가 없다며 남자에게 후견인이 돼달라고까지 부탁한다. 남자는 결국 소년에게 묻는다.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그리고 “네가 죽인 그 아이가 내 아들이었다”고 밝힌다. “이미 죗값을 치렀다”는 소년, 그리고 어느 새 소년의 목에 올려져 있는 남자의 손. ‘아들’은 속죄와 용서라는 말로 대체할 수 없는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혼돈스럽고 내밀한 공기로 스크린을 가득 채우며 관객을 윤리적 딜레마에 빠뜨린다.

아론 애크하트와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래빗홀’은 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은 부부의 이야기를 담았다. 남편은 아들의 흔적을 간직함으로써 상실의 슬픔을 달래려 하고, 부인은 죽은 아이의 자취를 온전히 없앰으로써 시련을 이겨내려 한다. 그리고 이들은 고통과 치유의 막다른 길끝에서 사고의 가해자 소년과 만난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피해자의 윤리학을, ‘시’는 가해자 혹은 공범의 윤리학을 다룬다. 그것은 용서와 속죄라는 어의의 너머에 있고 종교의 차원마저 벗어나 버린다. 이정향 감독의 ‘오늘’은 아예, 용서라는 말의 가벼움에 대한 노골적인 경고였다.

/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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