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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먼다큐]‘국민’ 디자이너 이상봉 “한글 때문이다”
“그래서 말이야…. 다들 학자들이 한 줄 알지만, 한글은 세종대왕이 직접 만들었다니까. 왕이 ‘백성을 사랑해서’ 그랬다는 건 정말 위대한 거예요. 거기에 얼마나 많은 위험이 뒤따랐겠어요? 반대와 암투, 시기, 모략 등등. 역사적으로 문자라는 건 기득권 세력이 절대 피지배계층과 공유하지 않으려고 했던 거잖아.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한마디로 파격이죠. 게다가 과학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하잖아. 우리보다 서양애들이 더 놀라워한다니까!”

올 시즌 컬렉션 평가도, 다음 시즌 패션 트렌드 전망도 아니다. 지난 주 종영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리뷰는 더 더욱 아니다. 그는 ‘한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인터뷰에 응했다. 한국적인 것들로 세계적인 옷을 만든다. 디자이너 이상봉이다.

인터넷 검색창에 ‘이상봉’을 입력한다. 패션 디자이너, 한글, 김연아, 그리고 무한도전이 함께 뜬다. 앞의 세 단어가 익숙하면 전부터 이상봉을 좀 알던 사람이고, 마지막 단어가 더 익숙하면 당신은 이제 막 이상봉을 알았다.

그는 최근 인기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 출연했다. 유재석ㆍ박명수 등 ‘무도’ 멤버들과 패션쇼를 했더니, 요즘엔 초등학생도 알아본다. 고(故) 앙드레 김 이후 가장 대중적인 ‘국민 디자이너’로 등극했다. 거기에 아들 이청청 디자이너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대이은 ‘父子’ 디자이너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도 만만치 않다.

이게 다 ‘한글’ 때문이다. 이미 2002년 세계 최고의 무대인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진출한 이상봉이지만, 2006년 똑같은 무대에서 한글 문양 의상을 처음 선보이며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했다.

▶이상봉, 영원한 ‘한글 사랑’

“벌써 그 드라마 끝났어요? 아, 날 잡아서 한꺼번에 봐야겠네요. 내용? 안 봐도 알지,하하. 책으로 봤으니까. 한글 디자인으로 주목받은 덕에, 많은 분들이 공부하게끔 도와주셨죠. 관련자료, 조언 때론 질책도 있고…. 끊임없이 피드백이 옵니다.”

드라마 줄거리를 줄줄 꿰길래, 애청자인 줄 알았는데 바뻐서 주의 깊게 볼 시간은 없었다고. 하지만, 애청자들도 만나는 이들마다 ‘뿌리 깊은 나무’ 이야기를 꺼낸다.

“세종대왕과 한글창제 관련한 이야기는 너무 익숙해서 다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니었죠. 세종의 인간적인 고뇌와 한글을 만들 때 일어난 암투 등을 그린 드라마가 방송된다길래 개인적으로 매우 기뻤어요.”

이상봉은 2005년부터 한글을 모티브로 디자인 작업을 해왔다. 처음엔 그저 디자인 분야로 접근했었지만 그것이 계기가 돼 ‘한글 사랑’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나도 잘 몰랐어요. 의상 발표를 하게 되면서 공부했어요. 그러면서, 점점 더 빠져들었죠. 한 번은 쇼 전에 함께 일하는 외국 친구들에게 한글 자료를 미리 나눠줬는데, ‘너네 왕, 최고다’ 하더군요. 진심으로 존경하는 눈빛이었어요. 한국에 그렇게 훌륭한 왕이 있었냐며 놀라워했죠.”

미학적 접근은 곧 사명감으로 바뀌었다. 수년째 한글 홍보 대사를 맡고 있다. 소위 ‘한글’로 제대로 스타 디자이너가 됐다. 그런데 그 ‘한글’이 그를 패션 저 너머의 영역까지 인도하고 있는 셈. 최근에는 ‘무도’뿐만 아니라, 코이카 단원들과 다녀온 봉사활동도 화제다. 환경재단 등 뜻깊은 자리에서 특별 패션쇼도 종종 연다.

“모든 분야, 모든 것에 눈과 귀를 열어두려고 해요. 그래서 이런 저런 활동에 지속적인 관심을 귀울이고 있죠.”

▶ ‘37세’ 이상봉, ‘무도’ 이후 더 젊어졌다

이상봉의 다소 파격적인 대중과의 만남 이면에는 ‘젊은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그의 나이는 비공개다. 아니 37세로 공개됐지만, 십수년째 그대로다. 파고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이젠 그의 나이를 캐묻는 사람들이 없다. 스스로 세운 약속이다. 영원히 서른일곱으로 살며, 자신의 창작활동에 방해가 되는 ‘의식’과 ‘편견’은 버리겠다는 것.

“특별히 서른일곱으로 정한건, 그 당시가 가장 힘들었기 때문이에요. 나이를 의식하면서 어떤 한계점을 느꼈죠. 이젠 진짜 나이를 잊었어요. 가끔 친구들을 만나서 나이 이야기가 나오면 어색해요. ‘어이, 자넨 언제 그렇게 나이가 들었나’ 하고 웃죠. 하하.”

37세에 멈춰버린 나이 탓에 방송ㆍ신문 등 언론과의 부딪힘도 줄곧 일어났다. 특히 ‘한국, 한국인’ 이라는 토크쇼에 초대받았을 때엔 스스로 심각하게 고민했다.

“제작진하고 마찰이 일었죠. 이력에 나이를 꼭 표시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제 그만 자신과의 약속을 깰까 하고 고민하다가 인터뷰를 사양했죠. 결국엔 나이 공개 없이 출연하기로 제작진이 양보해 줬습니다.”

영원한 ‘37세’ 이상봉이지만, 최근 출연한 ‘무한도전’으로 더 젊어졌다. 인기 예능프로에 출연한 덕에 초등학생들도 알아본다.

“학교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한글이나 세종대왕 이야기를 하다보면 요즘엔 ‘이상봉’이 꼭 나온다고 하더군요. 2편에 걸친 ‘무도’는 재방송까지 해서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지. 쑥스러워서 난 채널을 바로 돌려요, 하하.”

베이비복스 출신 심은진과는 ‘술친구’ 로 유명하고, 유진ㆍ바다 등 젊은 연예인들과 곧잘 어울린다. ‘무도’ 에서 한글 쇼를 할 때도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생각보다 멤버들이 굉장히 진지했어요. 감사한 일이죠. 기뻤어요. 익히 알려진 대로 유재석씬 뭐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고, 의외로 박명수씨와 하하가 긴장하더라고요.” 


▶생계 위해 시작한 디자인, 이제 온 가족이 후원자

유명 디자이너 대부분이 연예인들과 친분이 두텁지만, 그의 인맥은 서울예대 방송연예과 출신이라는 것도 한몫한다. 연극, 음악 등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

젊은 시절 그는 연극무대에 서고 싶었다. 만만치 않은 세계였다. 방황하던 청춘은 아내와의 결혼생활로 인해 차츰 자리잡기 시작했다. 어려운 살림에 생계를 위해 디자인에 뛰어들었다. 가족의 삶이,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

“지금은 가족 모두가 ‘이상봉 파리’ 관련한 일을 하고 있어요. 우선, 아들은 한국에서 디자이너이자 디렉터로 제 일을 돕고 있죠. 아내는 감사로, 딸은 미국에서 갤러리를 운영해요.”

최근 ‘시바스 리갈’의 패키지 디자인 작업으로 주목받은 디자이너 이청청은 ‘이상봉 파리’의 제너럴 디렉터다. 한국에서 이상봉 관련 대부분의 매니지먼트를 도맡아 하고 있는 그는 나중에 남성복 디자이너를 목표로 한다. 지난해 패션브랜드를 론칭하고 런던 패션쇼에도 이미 진출했다.

“사실, 딸이 더 디자인을 하기 바랐는데…. 나나는 지금 뉴욕 첼시에 거주해요.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미국 내 ‘이상봉’ 홍보를 하고 있죠.”

가족을 위해 디자인계에 뛰어든 이상봉인데, 이제는 가족들이 그를 위해 일하고 있다.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고, 가장 큰 후원자들이다.

▶ ‘포스트 앙드레김’

고 앙드레김과 이상봉은 늘 비교대상이었다. 두 디자이너의 적잖은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공백을 메워줄 만한 디자이너가 없었던 탓도 있지만, 해외 무대 속에서 두 사람의 행보가 비슷한 모양새를 띠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이상봉은 앙드레김 사후 ‘포스트-앙드레김’으로 거론되며, 한국 패션계에서의 역할론까지 흘러나왔다.

“글쎄, 그런 이야기 많이 듣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후배들과 소통하고, 이런저런 사회 활동에 참여하고…. 사랑받는 사람이니까, 받은 것 이상으로 환원해야 한다고 늘 생각해요.”

하지만 한국이 낳은 세계적 디자이너의 뒤를 잇는 인물로 지목된 것에 대해선 영광이라면서도 “그 분과 난 세대가 다르다” 며 조심스럽게 선을 긋는다. 코이카 단원들과의 봉사활동, ‘무한도전’ 멤버들과 함께한 ‘한글 쇼’ 등 거침없이 대중속으로 뛰어드는 자유로운 행보만 보아도 이미 알 수 있다.

“세대가 다르니, 일하는 방법이 다를 수밖에요. 그분은 패션의 예술적인 측면을 강하게 추구하셨지만 난 상업적이고 실용적인 것도 중시해요. 동시대에 사랑받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우리의 문화요소를 적극적으로 끄집어냈다는 점이 고 앙드레김과 이상봉의 가장 큰 공통점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리는 방법이 다르다는 게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그 분에 비하면 아직 내가 너무 부족하지. 그래도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어떻게 하면 대중들에게, 또 세계 속에 알릴까 늘 고민해요. 음, 앞으로도 변함 없을 것 같아요. 우리의 것을 모던하게, 미래적으로 풀어내는 작업이 좋아요. 서양이 공감하는 동양의 정체성. 이런 게 실제로 경쟁력을 가지고 있고….”

인터뷰가 끝나고 손바닥 반뼘 크기의 봉투를 건네받았다. 명함이다. 이상봉은 ‘Lee’ 대신 ‘Lie’를 쓴다. ‘Lie sang bong’ 이름 아래엔, 그래픽 디자인처럼 점자가 박혀있다. 그가 추구하는 ‘소통의 철학’은 드러나는 모양새도 미학적이다.

헌데, 트레이드 마크인 한글이 한 자 없는 게 아쉽다. 독특한 포장지 속에 좀 더 ‘스탠더드’한 명함이 들어있지 않을까. 봉투를 여니, 아무것도 없다. 뒤적거린 손끝이 민망해지려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예쁜 한글로 이상봉이 건네는 인사.

“행복하세요”

<박동미 기자@Michan0821>
/pdm@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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