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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쳐야 사는 남자
신용보증기금 최초 연임성공 안택수 이사장…시스템 철저 개혁 中企 ‘바람막이’로 재탄생
어릴적 꿈은 의사…

따지고 바로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에 

4·19 겪으며 사람 대신 사회를 치유하기로 결심했다.


우여곡절 끝에 기자 그리고 3선 의원이 됐지만 

18대 공천 못받고 낙심…

국회 재경위 경험 살려 신보 이사장 맡아 ‘제2인생’


금융위기 땐 평년의 두배 규모 보증 지원하며 

휴일도 반납하고 일에만…


OECD 국가 중 가장 먼저 위기탈출 일등공신 자임

관료주의 깨고 심사제도 개선·온라인 대출장터 등 큰 성과 자부심…

혁신 캠페인 펼치며 900여건 뜯어고쳤지만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든 바꿔보고 고쳐놔야 직성이 풀리는 한 소년이 있었다. 어릴 적 꿈은 의사였다.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싶었다. 치료해주고 싶었다. 어느 날 집안이 몰락했다. 소년의 꿈은 변했다. 사회를 고치려고 했다.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신문기자를 거쳐 국회의원이 됐다. 3선 후 공천탈락. 또 한번의 모진 시련을 겪지만 그는 여전히 꿈을 꾼다. 거치며 이제 노신사가 됐지만 그는 여전히 꿈을 꾼다. 이번엔 기업을 고치고 바꾸고 도와주는 일이다. 그의 꿈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안택수(68)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그는 지난 7월 3년 임기를 마치고 연임에 성공했다. 신보 35년 역사상 처음이다. 하지만 연임이 그를 휴먼다큐 지면으로 초청한 이유는 아니다. 최초, 처음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해도 의미가 없다면 기록의 가치만 지닐 뿐이다.

그가 우리의 관심을 끈 건 정치권의 ‘낙하산’에서 중소기업의 든든한 ‘우산’으로 변모한 일이다. 외부 입김 요란한 그 자리의 연임은 성과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안 그래도 쳐다보는 눈들이 많다. 폄하하는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정권 말기에 부임했다가 새 정권 들어서자마자 물러나게 될 것을 우려해서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십분 인정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안 이사장의 3년 성과는 그런 이론을 잠재우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25일 서울 공덕동 신보 본사에서 만난 안 이사장은 “‘낙하산’에서 중소기업의 ‘우산’으로 자리 완전히 잡았다고들 얘기한다”고 하자 “낙하산 아닌데…”라며 웃었다. 국회 재정위에서 오랫동안 신보를 보아왔고 샅샅이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강하게 부정하진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낙하산도 일 잘하면 되는 거 아뇨”

그는 낙하산이란 말에 ‘흥분’하지 않았다. 정치인과 기관장의 역학관계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중소기업들의 우산이 됐다는 말에 ‘반색’하지도 않았다. 3년 남짓한 기간에 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이 일궈놓은 성과는 많은 것을 웅변한다. 
                                                                                                      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사람 대신 사회에 메스를 대다
=1943년 경상북도 예천의 양철지붕 집에서 태어난 안 이사장의 꿈은 일관적으로 고치는 직업이었다. 아주 어려서는 병든 이의 몸을 고치는 의사가 되려 했다. 그러나 곧 정치인이 되겠다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어려운 가정사가 결정적 원인이었다. 그의 부친은 자유당 집권 시절 경북 내 청송, 봉화, 영천군 등 3개군 군수를 역임한 행정관료다. 아버지가 전국으로 부임지를 다니다 보니 그는 학업을 위해 고향 친척집에 남아야 했다. 남들은 유학가 하숙생활 한다지만 그는 고향에서 부모와 떨어져 생활했다. 일종의 역하숙이다. 그러나 4ㆍ19혁명으로 자유당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부친이 하루아침에 강제 퇴직을 당하고 만다.

당시 안 이사장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부친의 수입이 끊기니 공부는커녕 먹고살기도 어려웠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후반의 학생에게는 감내하기 힘든 상처였다. 그는 의사의 꿈을 버리고, 병들고 부조리가 극심했던 세상을 고치는 정치가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사회의 병폐를 해결하는 정치인, 국회의원이 되는 게 의사보다 낫다고 생각했다”며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가고 꿈을 이룸으로써 아버지가 당한 어려운 현실을 보상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들어간 대학(서울대 정치학과)생활은 그가 그리던 것과 너무 달랐다. 격동의 시기였다. 1964, 1965년 한ㆍ일 회담이 벌어졌고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줄기차게 이어졌다. “거의 데모만 한 것 같다”는 자신의 말대로 유치장을 드나들고 구속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무기정학도 2번이나 당했다. “당시에는 순수하게 한ㆍ일 협정을 막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다.”

그는 당시가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결국 한ㆍ일 협정이 맺어지긴 했지만 그처럼 격렬한 반대가 없었다면 일본이 우리나라를 더 우습게 봤을 것”이라고 했다. 당초 6억달러의 보상금을 제시한 일본이 3억달러를 더 얹어주게 된 것도 격렬한 반대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한 고치기 좋아하는 청년은 1968년 1월 한국일보에 입사한다. 정치인이 꿈이었지만 포도청인 목구멍을 구하는 게 급했다. 당시 운동권 출신 문리대 정치학과 졸업행이 갈 수 있는 분야는 딱 세 가지였다. 고시해서 공무원이 되거나 한국은행 입사, 그리고 또 한 가지가 기자였다. 다른 직장엔 학생운동 경력 때문에 원서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고시를 하자니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한국은행은 전공과 거리가 멀었다. 그나마 기자되기가 가장 도전해 볼 만한 선택지였다. 게다가 청년의 꿈인 정치 입문에도 길을 댈 수 있다.

그리고 결국 언론계에 몸담게 됐다. 정치부 기자생활은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그에겐 오히려 기회였다. 총리나 장관 같은 거물급 인사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장단점을 취사선택할 수 있었다. 향후 국회의원 시절에 많은 도움이 된 것은 물론이다.

기자에서 보건사회부 등 고급관료 경험까지 한 중년의 안택수는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한다. 하지만 낙선의 경험. 그리고 절치부심. 그는 결국 대구(북구을)에서 여의도 입성의 길을 연다. 15, 16, 17대 연이어 3선을 하고 재정경제위원장까지 역임한다.

그는 12년간의 국회의원 생활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고 서민경제를 보살피는 데 노력한 시기”로 자평한다. 아쉬웠던 점도 없지 않다. 워낙 돈이 없어 정계 입문도 늦어 제대로 된 정치적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중소기업 비바람 가려준 ‘낙하산’
= “엄청 충격받았지” 18대 총선에서 중진의원 안택수는 청전벽력을 맞는다. 3선의원 재정위원장이 공천에 탈락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는 이 부분에 할 말이 많다. 하지만 꾹 참고 산다.

“처음에는 굉장히 의외였고 한동안 당황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고쳐먹는다. 어쩔 도리가 없다. 4년 후를 기약하는 수밖에.

한편으론 3선도 했고 나이도 60대 중반에 가까우니 새로운 후배들이 잘할 수도 있을 것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또 얼마 후, 신보 이사장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왔다. 3선의원으로 잔뼈가 굵었던 그에게 썩 내키는 자리랄 수는 없었을 터다. 하지만 허송세월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스스로 말하듯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는” 그의 천성이 그 자리로 이끌었다.

사실 재경위를 맡았던 그 기간 동안 안 이사장은 신보를 곱게 보지 않았다 한다. “답변을 해도 똑 부러지지 않고, 답답한 구석이 있었다”는 것이 신보와 그 직원들에 대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막상 함께 일해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직원들이 매우 똑똑하고 일도 빈틈이 없다.”

그럼에도 성에 차지는 않았다. 그의 눈에 신보 직원들은 오랫동안 단련된 금융기관의 전형적인 모범생들이었다. 공부 잘하고 사고치지 않지만 꽉 막힌 모범생. 공직 생활을 거쳤던 그의 눈에는 신보 조직에서도 어김없이 관료적인 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또다시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그 와중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다. 대기업도 비틀거리는 판이었으니 중소기업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안 이사장은 과감하게 보증 규모를 늘려잡았다. 그러자면 고생은 직원들의 몫이었다. 안 이사장과 신보 직원들은 평일에는 밤 11시까지 일해야 했고 휴일도 반납했다. 2008년에 8조5000억원이던 보증 지원 규모는 2009년에 그 두 배가 넘는 17조7000억원으로 늘어났다.

그는 “국회의원 12년 한 것보다 신보에서 3년 일한 것이 훨씬 보람있다”고 했다. 국회의원 활동은 그 성과가 추상적이고 광범위해 피부에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및 시장경제 수호는 매우 중요하지만 마치 공기 같아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에 비해 신보에서의 고된 노력은 가시적인 결과를 낳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에 신보가 한몫을 한 것에 대해 그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정부가 방향을 잘 잡은 게 먼저겠지만 신보가 물량을 퍼부어서 중소기업들이 살아날 수 있었다.”

안 이사장은 “결과적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가 가장 먼저 회복하게 됐고 신보가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여기에 온라인 대출장터나 일석e조 보험, 신보스타기업 지정과 같은 새롭고 구체적인 성과도 안 이사장에게는 자랑거리다.

그렇게 1년을 고생하고 나서 직원들을 좀 쉬게 내버려둘 법도 하지만 안 이사장은 또 다른 고치기에 나선다. 금융위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취임 때 구상했다가 미뤄둔 조직 개혁을 시행한다. ‘그레이트 이노베이션(Great Innovation)’ 캠페인이 그것이다. 그는 직원들에게 스스로 어떤 것을 고치면 좋겠는지 찾아내라고 했다. 지난 1년 내내 이 혁신 활동을 통해 찾아낸 개선점은 무려 900여 가지가 넘었다. 조직을 거의 뜯어고친 셈인데 안 이사장은 말한다. “아직 내 마음에 들지는 않아….”

▶신용보증제도 해외로 수출=안 이사장은 우리나라의 보증제도가 아주 잘돼 있다고 자신한다. 신속한 의사소통이 장점인 우리의 보증제도가 금융위기를 넘어서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자부한다.

안 이사장은 “우리나라의 보증제도는 일본에서 배워왔다. 하지만 일본은 재보증 기능까지 포함돼 구조가 복잡하다”며 “경제 위기가 일어났을 때 초기에 과감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간결하게 만들어진 우리 제도의 뒷받침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최근 몇 년간 눈에 띄게 견고해진 국내 신용보증제도는 최근 해외로 수출되고 있다. 특히 베트남은 한국이 거쳐 온 지난 반세기의 경제개발 경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경제ㆍ금융 인프라 마련을 위해 우리 정부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발전 경험 공유사업의 일환으로 신보에서는 2007년부터 총 10회에 걸쳐 약 210명에 대한 연수를 통해 베트남에 보증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으며, 협력관계에 있는 베트남개발은행(VDB)이 2009년 3월부터 기업대상 보증업무를 수행하면서 2010년까지 약 1000개 업체에 6000억원 규모의 보증을 지원하며 베트남 중소기업의 금융 접근성 개선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캄보디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많은 신흥 개발도상국에서도 신보의 보증제도를 전수받고 싶다는 요청이 들어오고 있다.

“사실 우리가 보증제도를 교육한다고 해서 돈을 받는 것은 아니다”라며 웃은 안 이사장은 “신용보증제도 수출을 통해 국가 위상이 제고될 수 있을 뿐아니라 보증제도 전수를 통해 양국 간 경제협력의 폭을 넓힐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자원이 풍부한 카자흐스탄과 같은 나라에 보증제도를 가르쳐 주면서 양국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최근 각국에서 사활을 걸고 있는 자원전쟁에도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는 것이 안 이사장의 판단이다.

▶은행들 아직 멀었다=지난달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주재한 ‘1박2일’ 중소기업 투어에 참가한 안 이사장의 모습에 같이 동행한 이들은 모두 놀랐다고 한다. 고희를 눈앞에 둔 적지 않은 연령에도 정력적으로 현장을 누비는 그의 모습 때문이다. 함께한 이들 모두가 ‘생고생 1박2일’이었다고 표현할 만큼 만만치 않은 일정이었지만 안 이사장은 사실 현장이 낯설지 않다. 중소기업 최고경영자(CEO)들과 자리를 갖고 보증제도에 대한 여러 얘기를 들으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하곤 했다. 3년 동안 110군데 신보 지점을 2차례나 빠짐없이 살피기도 했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어찌 보면 기본이지만 지키지 쉽지 않은 철칙을 묵묵히 수행해왔다. 안 이사장 취임 이후 탄생해 신보의 ‘히트 상품’이자 전 금융업계에서 벤치마킹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는 ‘중소기업 온라인 대출장터’와 ‘일석e조 보험’은 현장 경영의 산물이다.

그는 최근 은행의 중소기업 심사제도 강화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다. “김석동 위원장이 중기 관련 금융 실태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강한 것 같다”고도 했다. 그의 깐깐한 시선에는 아직 멀었다. 오히려 “중소기업에 대해 기업평가나 심사능력이 신보의 절반도 안된다”며 “한심한 수준”이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은행들이 심사능력을 향상시켜 중소기업의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는 노력이 여전히 미흡하다는 것이 안 이사장의 판단이다. “손 안 대고 코 풀려 한다”는 것이다.

안 이사장은 취임 이후 신보의 보증심사제도를 뜯어고친 바 있다. 중소기업들이 가진 미래 가능성까지도 봐주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6억원을 들여 신보 35년간 한 번도 안 바뀐 보증심사 방법을 바꿔놨다”고 그는 말했다. 몇십 년간 존치된 제도를 하루아침에 고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지만 취임 후 오래지 않아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내부 반발에도 밀어붙이며 결국 성사시켰다. 은행권 밖에서 일해왔던 그이기에, ‘낙하산’이기에 가능했던 일일 수도 있을 터다.

신보의 도움을 받고 있거나 ‘졸업’한 기업들은 누적으로 100만개 를 넘는다고 한다. 아직은 신보를 통해 보증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대해 기업들이 다소 꺼려하고 있기는 하지만 “신보가 보증지원 안 했으면 이렇게 커나갈 수 없었다”며 고마움을 표시하는 경영인들도 상당수 있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안 이사장은 기자에게 작은 선물을 건넸다. 중기 현장을 누비면서 자신이 눈여겨본 한 기업이 만든 넥타이와 스카프였다. 그러면서 “잘될 기업”이라며 이 기업에 대한 ‘홍보’를 잊지 않았다.

‘낙하산 인사’라며 안 이사장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던 시선이 왜 ‘중소기업의 든든한 우산’이라는 눈빛으로 바뀔 수 있었는지 또 한 번 알 수 있었다. 안 이사장은 이미 신보 그리고 중소기업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밑그림을 그려나가고 있다.

안택수가 걸어온 길
▶1943년 경북 예천
▶1966년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1968년 한국일보 입사
▶1982년 보건사회부 공보관
▶1988년 국민연금공단 재정이사
▶1996~2008년 15,16,17대 국회의원
▶2008년~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대담=권용국 경제부장/ kwon@heraldcorp.com
정리=하남현 기자/airinsa@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 moo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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