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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년 외고집 김준일
중학교 졸업후 가방 하나 들고 무작정 상경

밀폐용기 대명사 ‘락앤락’신화창조의 비밀…





‘개천에서 용 난다.’ 가진 것 없이 맨손으로 성공한 사람을 빗대는 이 속담은 이제 옛말이 됐다. 부의 대물림과 학연ㆍ지연 속에 사회의 출발선은 제각각이 돼 버렸다. 갖춘 자의 출발선은 이미 정상 가까이 놓여지지만, 그렇지 못한 자의 출발선은 땅이거나 그 이하다. 그나마 차근차근 올라가는 사람도 그들만의 리그 앞에서는 사다리가 치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걷어차이는 사다리를 놓치더라도 지푸라기를 잡고 기어코 올라오는 사람은 독하다. 그의 눈빛에는 생존을 향한 살벌함이 담겨 있다. 변칙과 반칙, 요령과 요행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노력으로 승부를 거는 사람의 심장은 누구보다 뜨겁다.

그래서 통하기 마련이다. 독하지만 정직하고, 뜨겁지만 폭발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위태로운 사다리 없이도 정상에 닿을 수 있다. 황새를 좇지 않고도 자신만의 리그를 만들 수 있다.

락앤락. 국내 주방생활용품의 브랜드이지만 이 고유명사는 어느 새 일반명사가 됐다. 가정집 어디에나 하나씩 있다는 락앤락은 이제 밀폐용기의 또 다른 이름이 됐다. 이는 김준일 락앤락 회장이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던 주방용기를 지난 30년간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과정의 산물이다.

중학교 때 가방 하나 달랑 메고 외로운 상경길에 오른 이 남자는 어떻게 지금의 락앤락을 만들었을까. 그의 성공스토리 속에는 격변의 시기를 겪은 한 사업가의 독하고도 뜨거운 본능이 담겨 있었다.

이달 초 서초동에 위치한 락앤락 직영점 지하 1층 쇼룸에서 김 회장을 만났다. 쇼룸에는 각양각색의 주방용기들이 진열돼 있었다.


-주부들이 주로 쓰는 주방용기를 남자 CEO가 처음부터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1978년은 우리나라가 수입 자유화를 선언한 원년이었습니다. 그전에는 수입이 전혀 안돼 P/X에서 미국 물건 가져오는 게 전부였죠. 그러다 신문에서 수입이 허용된다는 기사를 보고 직감적으로 내 직업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나이 27세였죠. 마침 사업을 해보려고 결심한 시기이기도 했고요. 나보다 먼저 수입품 사업을 한 사람이 없었기에 평생 직업이 될 거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럽 선진국인 이탈리아, 독일 등의 전시회를 찾아다녔는데 마침 그때 주방용기를 전시했죠.

-그 당시 우리나라엔 주방용기가 생소했을 텐데요.

▶국민소득이 증가하는 시기에 대체로 주방용품이 가장 성장하더라고요. 패션이나 IT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주방용품이 디자인 측면에서 가장 어필할 수도 있었죠. 


대구 시내서 제일 높은 건물 소유하신 아버지. 

그 당시 BMW 오토바이를 타셨죠. 

그러나 중학교 이후 가세 기울어 졸업후 곧바로 서울로

독한 마음 품고 방송통신대 다니면서 낮엔 영업사원으로 학비 마련

그때부터 나의 성격도 전투적으로 변했다.

신문에서 우연히‘수입자유화’기사본 후 1978년 국진유통 설립

7년후 제조업 도전 참담히 끝났지만 

악바리 근성으로 버텨 도전 또 도전

제품 잠글때 나는‘ 딱딱’소리에서 영감얻어 브랜드 ‘랙앤락’이 탄생

난 아직 해외여행도 제대로 가본 적 없고 심지어 주말엔 골프도 안친다.


-그래도 보수적인 사회였는데 어떻게 그런 결심을 했나요.

▶절실했습니다. 자본금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녀 구분 이런 거 생각 안 했습니다. 오로지 상품을 판매하겠다는 마음에 서울 남대문시장, 부산 국제시장, 대구 교동시장 등에서 발품을 팔았습니다. 상인들에게 뭐가 잘 팔리는지 일일이 다 물어봤습니다. 그렇게 시장조사만 3년간 했죠.

-처음부터 혼자였나요.

▶동업도 돈이 있어야 하죠. 부모님한테 받은 것도 없었는데요. 동네 잘 아는 할머디들 계모임에 갔죠. 거기서 낙찰계로 500만원 곗돈을 탔습니다. 이것도 부족해서 사채도 끌어다 썼어요. 월 이자가 4%가 넘었어요.

-그 정도로 꼭 돈을 벌어야겠다는 이유가 있었나요.

▶뭔지 모르게 직장에서 급여받는 생활은 내 성격에 안 맞는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했지만 급여보단 수당받는 생활을 했죠.  오너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본능적으로 싫었습니다.

-사회생활은 언제부터 했습니까.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대학 입시 공부하면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면서 수당 받은 걸로 학비를 댔습니다.



김 회장은 1968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혼자 올라왔다. 중학교 때 등교하다 다리가 부러져 당시 고교 입시 과목 중 60점이 배점된 체육을 포기해야 했다. 결국 진학에 실패한 김 회장은 독한 마음에 검정고시로 1년 만에 대학가겠다고 결심했다. 

-어린 나이에 상경길이 겁나지 않았나요.

▶너무 어려서 오히려 겁이 없었어요. 그것보다 자존심 많이 상했죠. 거기다 돈도 없어서 불광동 누나 집에서 돈 벌면서 시험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목표였던 서울대는 보기 좋게 낙방했어요.



재수가 부담됐던 김 회장은 방송통신대 행정학과에 진학한 뒤 군에 입대했다. 20대 초반을 평범하게 보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사업에 대한 구상이 가득찼다. 그러다 신문에서 수입자유화라는 운명과도 같은 기사를 보게 되는 것이다.

-당시 기억이 나나요.

▶지금도 생생합니다. 뭔가가 번쩍이는 느낌이 굉장히 강했죠. 특히 내가 처음 한다는 생각에 설렜습니다.

1978년 김 회장이 설립한 회사는 국진유통이었다. 그는 한국 제품과 차별화된 선진국 물품을 들여와야 우리나라가 온실 속 화초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에 외국 제품으로 우리 산업에 자극을 줘야 나라가 나아간다는 의미로 국진유통으로 지었다.

-일은 순조롭게 풀렸나요.

▶남대문 도매시장에서 수입제품으로선 가장 탁월한 성공을 보였습니다. 7년간 미국과 유럽에서 200개 회사 제품을 들여와 196개를 성공시켰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200개 중 196개를 이익 내고 론칭에 성공한 셈이죠. 이 바닥에서는 쉽게 깨기 힘든 기록일 겁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이 정도에 만족할 만한 범인(凡人)은 아니었다. 7년간 유통사업을 하는 사이 그의 관심은 다른 데 가 있었다.

그는 7년간 하던 유통에서 제조로 전환했다. 돈은 잘 벌지만 어딘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내 일이 아니라 남의 것을 심부름하는 수준에, 또 일이 쉬우니까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자고 생각했다. 이에 하던 아이템 권리를 다 나눠주고 그대로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사명도 국진유통에서 국진화공으로 바꿨다. 

-유통과 제조는 완전히 달랐을 텐데 어땠나요.

▶공장 설비를 들이는 과정에서 스위스 리스 자금을 썼습니다. 또 기술을 일본에 의지하다 보니 일본 원부자재를 쓸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1985년 갑자기 환율이 급등, 특히 엔화와 스위스프랑이 50% 올랐습니다. 달러는 하락했죠. 대부분 외화 대출을 달러로 하는데 당시 스위스프랑이 15년간 안정적이라 선택했는데 실책이었죠. 이익을 내도 모두 환차손으로 들어가니 회사가 기울 수밖에요. 여기에 노사분규로 임금이 3년간 배로 올랐어요.

-제조로 돌아선 거 후회하지 않았나요.

▶몇 번이나 했죠. 그렇지만 수입하던 거 다 관두고 제조로 들어갔기 때문에 컴백할 곳이 없었어요. 배수의 진을 치고 다른 자본주를 끌어들였지만 회사 키우기보다는 차익내는 것에 관심이 있더라고요. 다시 이를 갈았습니다. 다시 돈을 벌어서 재인수하겠다고 맡기고 예전 일터로 돌아갔습니다.

-뭔가 보여주겠다고 큰소리치고 떠났던 곳인데, 심정은 어땠나요.

▶다시 돌아간 날 커피 7잔을 먹었어요. 도매상들은 좋은 실력 놔두고 왜 고생하냐고 했죠. 그러면서 예전 실력 발휘하라며 계약금부터 건네기도 하더라고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날 밤 김 회장은 남대문 시장 인근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 1병을 기울이며 6개월 안에 승부를 걸자고 다짐했다. 그는 다시 해외에 나갔고 6개월 만에 신상품을 시장에 많이 깔았다. 실적은 예전 못지않았다. 그런데도 김 회장은 그가 실패한 제조로 다시 향했다.

-제조업에 두 번째 도전할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이미 전 자본주가 대부분 매각하고 회사를 축소한 상태라 인수하기는 쉬웠어요.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하는 셈이었죠. 과거 잘못을 분석하니 제조, R&D, 유통 세 가지 다 하려고 한 게 패착의 원인이었습니다. 제조 메커니즘을 우습게 생각한 거죠. 그래서 공장 없는 제조를 하자는 생각에 기계를 내보내고, R&D와 영업만 하기로 결론냈습니다.

-락앤락이란 브랜드가 이때 나왔나요.

▶제품을 만들면 일단 성공은 하는데 수명이 기껏해야 1~2년인 거예요. 효율성은 떨어지고 재고만 늘었죠. 브랜드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어요. 소비자는 제품이 아니라 브랜드를 기억하기 때문이죠.



김 회장이 브랜드를 만드는 작업의 첫 출발은 어떤 제품에 브랜드를 달 것인가였다. 당시만 해도 그가 취급하는 제품은 600여개에 달했다. 이에 지난 10년간 했던 것 중 한 가지만 택하기로 했다.

철저한 시장조사에 다시 들어간 끝에 ▷창고 관리가 간단해야 하고 ▷잘 안 깨지며 ▷부피 너무 크지 않고 ▷계절을 타지 않고 ▷타국의 문화와 관습에 어긋나지 않는 등 20여가지에 달하는 요건을 모든 제품에 대입했다. 여기서 살아남은 단 한 가지 제품이 바로 밀폐용기였다.

-해답을 찾은 심정은 어땠나요.

▶무릎을 탁 친 것도 잠시였죠. 밀폐용기 시장을 조사하려고 홍콩, 싱가포르, 일본 등에 나갔는데 다리가 후들거리더라고요. 밀폐용기가 너무 많았던 거죠. 일본만 해도 전시회에 나온 회사가 200개가 넘었습니다. 전체 밀폐용기 회사가 얼마나 될지 감이 전혀 안 잡혔는데 대충 10만개는 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도 밀폐용기를 고집하셨군요.

▶어떻게 하면 10만명의 경쟁자를 이길 수 있을까 고민했죠. 해외서 사들인 밀폐용기를 책상 위에 다 올려놓고 보니 스타일이 같더라고요. 딱딱한 폴리프로필렌 재질에 부드러운 폴리에틸렌을 밀착시키는 식이었죠. 순간 머리에 뭔가 스치더라고요. 본능적으로 결착식으로 가자는 생각이 났습니다. 콘셉트가 다르면 10만 대 1이 아니라 1 대 1의 싸움이라는 자신감이 들었어요. 해볼 만한 전투인 거죠.

-나머지 제품들은 어떻게 됐나요.

▶제가 좀 과격하게 개발했어요. 599개 제품은 팔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창고에 넣어 놓고 결착식에만 열중했습니다. 유통에서 제조로 전환한 데 이어 결착식 밀폐용기에만 열중한 이 시기가 제 인생의 두 번째 터닝포인트였습니다.

1981년 국진유통 시절 김준일 회장. (앞줄 가운데)

같은 시기 김 회장은 브랜드도 고안해 냈다. 처음에는 사내공모를 했는데 뜻을 조합한 후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쉽게 기억되고 들었을 때 제품이 아닌 형상이 기억되는 브랜드를 원했다. 그래서 매일 저녁 공장에서 만든 결착식 제품을 갖고와 연구에 들어갔다. 눈 감고 ‘딱딱’ 소리만 들어도 금형이 잘됐는지 구분하는 연습을 했다. 그렇게 1년간 제품을 열고 잠그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이거 락앤락이구나’라는 직감이 다시 심장을 관통했다.

-상표등록은 언제 하셨나요.

▶공교롭게도 외환위기가 닥친 1998년이었어요. 내수가 잘될 리 없었죠. 그나마 해외에선 기존에 안 나온 상품이라 장사가 그런 대로 됐죠.

-내수 돌파구는 어떻게 찾았나요.

▶왜 안 팔리는지 직접 봐야겠더라고요. 도곡동 월마트 큰 기둥에 숨어, 소비자의 반응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두 시간 소비자의 표정을 관찰했죠. 처음엔 신기해하는 듯하더니 갸우뚱하고 다시 놓는 거예요. 아, 설명이 필요한 제품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홈쇼핑으로 나가자고 결심했죠.

-당시 홈쇼핑이 검증된 루트는 아니었을 텐데요.

▶캐나다 바이어로부터 홈쇼핑의 장점에 대해 조언을 받았습니다. 다른 광고비보다 효과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해외 여러 곳에서 확보한 영상자료를 들고 찾아갔습니다. 반응은 요즘말로 대박이었요. 역시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설명을 해줘야 움직이더라고요.



당시 홈쇼핑에서 판매한 밀폐용기는 8~12개 세트였다. 지금은 800가지가 넘는 밀폐용기가 시장에서 팔리고 있다.

-제품 개발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요.

▶그 많은 것을 다 아이디어 낼 수는 없죠. 글로벌 시장에 나가서보니 국가별로 쓰는 용기가 다 달랐어요. 도넛, 버터, 식빵 등 내용물에 따라 용기가 다 달라지는 거죠. 현재 110개국에 수출하는데 바이어가 주문한 아이디어가 더 많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면 행정학 전공자란 느낌이 전혀 안 듭니다. 영업 감각이 어릴 때부터 남달랐나요.

▶집이 대구 시내 한복판에서 상업을 해서 어릴 때 보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20대부터 이론에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필드에서 감각으로 익혔기 때문에 후천적으로 사업과 관련된 직감과 본능이 자라난 거 같습니다.

-시내 중심에서 장사를 했으면 꽤 유복했을 것 같습니다.

▶부친이 BMW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습니다. 대구 시내 제일 높은 건물 소유주셨어요. 그러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죠. 오죽하면 중학생 나이에 서울로 혼자 올라왔겠어요. 그러면서 성격이 전투적으로 변했습니다. 다행히도 생존본능을 향한 전투력이었던 거죠.

이처럼 김 회장은 악바리 같은 면모로 지금의 락앤락을 키웠다. 락앤락은 현재 5000명이 넘는 직원에 연 매출 4000억원에 달하는 중견기업이 됐다. 또 지난해에 코스피에 상장하면서 김 회장은 1조원대 주식 거부에 들기도 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부자가 되셨는데 기분은 어떠세요.

▶글쎄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수 없지만, 저 스스로 봤을 땐 결코 부끄러운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쉽게 번 돈을 우습게 쓰는 일부 사람 때문에 소위 부자라는 사람들이 욕을 먹죠. 저는 한 달에 절반은 해외출장을 가는데 아직 제대로 된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술도 밤늦게까지 먹지 않고 심지어 주말에 골프도 안 쳐요.

-그럼,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시나요.

▶스트레스를 못 견디면 사업 그만둬야죠.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꼭 베스트 솔루션은 아닙니다. 내 스스로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과정에 집착하자고 생각하면 스트레스와 멀어지더라고요.

-앞으로 락앤락을 어떤 기업으로 키울 생각인가요.

▶30년간 했던 노하우를 살려야죠. 롤모델이 P&G입니다. 생활용품을 만들어 매출이 삼성전자와 비견되는 세계적인 기업이 됐죠. 저도 주방카테고리로 P&G처럼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정태일 기자/killpas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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