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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가을 길은 조용히 나를 허무는구나
바람따라 서걱서걱 억새 울어대는 제주…19코스 섬 둘러도는 올레길, 낯선이 발길에 비경은 수줍어하고…
가을 빛깔은 붉고 노란 원색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희고 흐릿한 색도 매력이 있다. 제주의 가을은 한양 아씨 입술같은 단풍보다, 바람따라 서걱서걱 울어대는 억새가 더 일품이다. 소박한 맨얼굴로 나그네 발길을 잡아끌면 여간해선 유혹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여기에 바다와 하늘의 쪽빛이 더해지고 검은 현무암이 제자리를 잡으면 눈길이 가는 곳마다 멋스러운 병풍이 펼쳐진다.

이 모두가 제주 올레길에서만 볼 수 있는 숨겨진 가을 풍경이다.

제주 올레길은 1코스인 성산포에서 시계방향으로 구좌읍 김녕 19코스까지 섬 한 바퀴를 돌아 둥그런 원으로 하나로 연결된다.

올레길 곳곳엔 그동안 발길이 닿지 않은 오지의 때묻지 않은 비경이 수줍게 빛을 발한다.

지난주 말 억새가 익어가는 가을 제주에 다녀왔다. 

제주 올레길은 1코스인 성산포에서 시계방향으로 구좌읍 김녕 19코스까지 섬 한 바퀴를 돌아 둥그런 원 하나로 연결된다. 올레길 곳곳엔 그동안 발길이 닿지 않은 오지의 때묻지 않은 비경이 수줍게 빛을 발한다.

▶소정방폭포 바다와 접한 숨은 비경 올레길 6코스=올레는 집으로 들어서는 길고 좁은 길, 거친 바람을 막아주는 아늑한 길을 의미하는 제주말이다.

쇠소깍에서 외돌개로 이어지는 올레길 6코스는 서귀포칼호텔 해안을 따라 소정방폭포 등 숨은 비경이 많고 길이 평탄한 편이어서 걷기에 좋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니 어느새 현무암을 포근하게 감싸안은 해안 절경이 나왔다. 또 조그만 오솔길을 돌아서니 어른 하나가 허리를 굽히고 지나갈 높이로 하늘을 가린 숲길이 다람쥐 구멍처럼 여기저기 나그네를 반긴다.

올레길 곳곳엔 동자석, 돌하르방, 방사탑을 만날 수 있다. 신장 1m가량 천진한 표정의 동자석은 현무암의 척박했던 제주에서 평생 돌과 함께 살아야했던 서민의 아픔이 서린 돌의 상징이자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돌 문화였다. 돌하르방도 가정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로 여겨졌다. 방사탑은 자연석상을 올려 놓은 것이 특징이다. 주로 나쁜 액을 물리치는 주술적 의미가 있다.

하지만 제주 올레길은 겉만 번지르르한 여행길이 아니다. 떫은 감물을 짜내 염색한 제주 갈옷마냥 곳곳에 제주인의 넋이 깊이 배어 있다. 제주는 어느 곳보다 한이 많은 섬이다. 고려 땐 독립왕국 탐라가 쇠락한 뒤 여몽연합군과 삼별초 간 전란에 시달렸다. 지금도 올레길 곳곳엔 당시 쌓은 환해장성의 유적이 남아 있다. 또 조선시대는 육지에 편입되면서 중죄를 범한 귀양객이 유배되던 절해고도였던 만큼 곳곳에 고향을 그리며 세상을 떠났던 이의 유적을 만날 수 있다.

가깝게는 현대사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진지터와 4ㆍ3항쟁의 학살지 등이 남아 있다. 제주 올레길은 그래서 제주 역사와 깊이를 알고 걸으면 가슴으로 경치를 느낄 수 있다. 

쇠소깍에서 외돌개로 이어지는 올레길 6코스 중에서 서귀포칼호텔 해안에는 소정방폭포가 숨은 비경을 자랑하고 있다.(왼쪽) 쇠소깍에서 외돌개로 이어지는 올레길 6코스 가운데 관광객이 작은 언덕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있다.

▶‘난드르마을’ ‘박수기정’의 8코스=서귀포시 안덕면 대평리 난드르(넓은들)마을은 제주의 몇 안되는 비경 중 하나다. 동해용왕의 아들이 스승의 은혜를 갚으려고 넓은 들을 만들자 나중에 마을이 되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올레 8코스의 종점이자 9코스 시작점에 위치해 있다. 맑은 날이면 앞으로는 가파도ㆍ형제섬ㆍ마라도가 보이고 뒤로는 한라산, 옆으로는 군산ㆍ안덕계곡ㆍ박수기정 등 제주의 절경이 모두 보인다.

그 중에서도 박수기정은 1300m의 주상절리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절벽 위에는 100만평 농경지가 자리잡고 있어 멀리서 보면 웅장한 성벽을 보는 듯 위엄이 있다. 난드르마을은 느낌이 아늑하고 멋스러워 외지에서 정착한 이가 특히 많다. 영화감독 장선우 씨 부부의 물고기 카페를 비롯해 외지인이 문을 연 카페와 게스트하우스가 올레꾼 사이에선 입소문이 나 있다.

몇 년간 티베트에서 살다온 오지탐험가 부부가 주인인 게스트하우스 ‘티벳풍경’이 그 중에서도 유명하다. 티베트의 농가로 개조한 게스트하우스는 처음 오는 손님이 연방 셔터를 눌러댈 만큼 매력적이다. 또 마을 곳곳도 공공미술로 타일과 각종 문양으로 가꿔 제주속의 이국적인 풍경이 드러난다.

▶억새 물결 산굼부리=제주의 억새는 제주시 조천읍 산굼부리 억새의 자태가 최고다. 쪽빛 하늘 아래 능선 한 쪽이 온통 은빛 억새 물결로 넘실댔다. 여인의 긴 머릿결처럼 숨막힐 듯 아름답다. 억새는 분화구 정상보다 능선에서 바라봐야 제대로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억새밭 좁은 사잇길로 줄지어 지나가는 사람 행렬도 화선지에 그려진 검은 획 하나처럼 그대로 그림이 된다.

산굼부리는 산과 화산의 화구를 일컫는 제주말 굼부리의 합성어. 산굼부리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국내 유일의 분화구 자연 식물원이다. 난대, 온대, 침엽수, 활엽수 등 다양한 식물군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산굼부리를 벗어나 중문으로 향하는 길도 한 눈을 팔 겨를이 없을 만큼 절경이다. 하늘을 찌를 듯 메타세쿼이아만큼이나 곧게 뻗은 삼나무 숲길에 넋을 빼앗기고 얼마를 지났을까 한라산에서 성판악으로 나오는 길 양쪽에 머리를 맞대고 하늘을 가린 숲 터널길이 나그네를 유혹했다.

심형준 기자/cerju@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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