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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상수 영화를 보는 맛, ‘북촌방향’
만나는 사람마다 “영화 안 찍으세요”라고 묻는 영화감독이자 지방대학의 교수 성준(유준상). 4번째 작품까지 찍고 오랫동안 메가폰을 잡지 못한 인물이다. 그가 어느 겨울 서울로 올라와 북촌에 살고 있는 선배 영화감독 ‘영호’(김상중)를 만나기로 한다. “영호형이 전화를 꺼놨다, 진작 전화를 해 놓을 걸 그랬다. 이번에는 정말 영호형만 만나고 갈 거다”는 성준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주인공의 바람과는 달리 예기치 못한 만남과 술자리, 해프닝들이 이어지는 사나흘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성준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낮술을 한 잔 걸치다 자신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낯모를 영화학과 학생들과 동석해 취하기도 하고, 느닷없이 옛 애인 경진(김보경)의 집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너 밖에 없었어, 너였어야 해 ”며 침대 위로 기어오르기도 한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며 시키지도 않은 신파조의 맹세를 하며 헤어지는 마당에 경진은 “선생님, 그런데 담배 두 개피만 주고 가면 안 돼요?”라고 묻는다. 



성준은 북촌에서 영호와 영호의 후배 여교수 보람(송선미)을 만나 ‘소설’이라는 술집으로 향한다. 술먹고 헤어지고 다시 북촌을 거닐던 성준은 어제 봤던 여배우를 길거리에서 계속 마주치고, 영호, 보람과 저녁을 먹은 후 술집으로 간다. 갈 때마다 술집 여주인 예전(김보경 1인 2역)은 손님보다 늦게 가게에 나오고, 보람은 매번 그녀를 타박한다. 반복되는 상황처럼 대화도 어제 꾼 백일몽처럼 반복된다. 성준은 옛 연인을 닮은 술집 여주인과 키스를 하고 하룻밤을 보낸다. 



‘북촌방향’은 우연처럼 반복되는 만남과 사람들, 술자리, 농담, 이야기들이 경쾌하게 펼쳐져 쉼없이 웃음을 자아낸다. ‘찌질한’ 욕망과 속물근성이 그려내는 인류학이 홍상수 감독의 초기 작품이었다면 편수를 더해 갈수록 그의 작품은 우연, 반복, 차이, 기억, 재현 등의 키워드로 아이러니한 삶과 일상의 총체를 마치 ‘즉흥곡’처럼 그려나가고 있다. 홍상수의 영화에선 삶은 인과관계의 사슬로 연결돼 있다기 보다는 우연이 그리는 무수한 접점의 반복으로 그려진다. 홍 감독은 매번 북촌을 가게 되면 비슷한 사람을 만나 비슷한 장소를 찾아가고 비슷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삼아 영화를 구상했다고 했다. 똑같은 길목, 똑같은 한정식집, 똑같은 술집, 똑같은 사람들이 되풀이 되는 ‘북촌방향’에서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명확하지 않다. 어제 일어난 일일 수도 있고, 오늘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다.

사실 우리의 기억이란 늘 그렇게 혼돈과 미로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이 아닐까. ‘북촌방향’에서는 시간의 경계가 꼬여버리고, 일상과 비일상, 실재와 가상,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오랜만에 얼굴을 드러낸 배우 김의성은 극중에서 “성준의 첫 영화에 함께한 배우”로 등장하는데, 실제로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그의 출연작이다. 한 인간의 삶과 정체성이란 ‘과거’의 총체이자 집적이고 ‘기억’이란 과거 특정 시공간에서 일어난 일의 ‘(언어ㆍ감각적) 재현’이며, 영화는 ‘삶과 현실의 재현’이라고 한다면, 홍 감독의 영화는 ‘기억과 재현’에 관한 유머러스한 에세이다. 이 영화는 지난 8일 소규모로 개봉해 13일까지 1만6000여명을 동원했다. 청소년관람불가.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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