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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무의미로 소설에 복수하기
“내가 마음대로 뒤틀어 심하게 뒤틀리기도 한 이야기들이 있는 이 글에는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도, 혹은 재미에 대한 나의 생각, 혹은 사나운 초록색 잠을 자는 무색의 관념들, 혹은 뜬구름 같은 따위의 부제를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영문이 소설 ‘어떤 작위의 세계’(문학과지성사)에 대해 변명하듯 쓴 글이다.
관념과 실재, 사실과 상상이 경계없이 이어지는 소설은 이야기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 사건이나 인물, 배경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지도, 또 한축 한축 쌓아 올려지는 구조가 아닌, 생각과 상상이 마치 방사선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유일한 한 점으로 돌아오는 모양새를 갖는다. 그 점은 바로 ‘나’의 생각이다.

소설은 과거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의 기억과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의 이야기로 나뉘어 있다. 작가 자신인 동시에 소설의 화자인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과거 여자 친구와 그녀의 멕시코계 남자 친구가 살던 집에 잠시 함께 지냈던 때를 떠올린다. 황량한 벌판에 지어진 그녀의 집에서 매일 데킬라를 마시고 황량한 벌판에 나가 총질을 하거나 집안에 들어온 전갈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며 무위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불쑥 떠난 샌프란시스코여행에서 나는 그들과 헤어져 워싱턴 광장에서 호보를 만나기도 하고 아메리칸 인디언에 관한 상상 등을 하며 짧은 시간을 보낸다.
5년 후 다시 샌프란시스코를 찾은 나는 워싱턴 광장공원에서 다른 호보를 만나 다시 예전에 했던 인디언에 관한 상상을 만든다.

모든 게 시시껄렁한 그에게 유일한 취미는 상상하기다. 늙은 개와 함께 사는 늙은이 얘기를 꾸며보기도 하고, 거지가 되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이론을 세우며 즐거워하고, 궁상에 대한 궁상맞은 생각을 하며 나름의 이론을 편다.
고찰과 생각, 관념, 상상하기의 진술로 만들어진 소설의 세계는 어쩌면 소설에 대한 복수처럼 보인다.

길에 버려진 소파를 두고 어린 금발머리 여자아이와 승강이를 한 후 나는 복수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마요네즈와 금발 여자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소설에 대한 복수와 무와 무의미, 그리고 존재의 근거 없음에 대한 복수뿐이라는 생각을 하며, 처절한 복수를 되새기며, 그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더욱 기이한 생각들을 하며 더욱 기이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본문 중)


이 소설의 소설다움을 굳이 꼽자면 상상속에 위치하려는 한 독특한 인물이다. 현실에 바탕한 살아가는 ‘나’는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다. 오로지 생각과 상상의 행위를 위해 존재한다. 이 소설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태환은 “그는 무의미하고 근거 없는 생각과 소설을가지고 존재의 무의미함과 근거 없음에 대한, 또는 무의미하고 근거없는 소설과 이 세계에 대한 복수를 시도하는 셈”이라고 해석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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