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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자이너 최범석 “대학 가면, 내 월급 오르나요?”

“학력, 아쉬울 때 없어요. 전혀. 지금 대학 졸업장 생기면 저한테 월급 더 주나요?”(웃음)

그는 ‘경계(境界)’를 ‘경계(警戒)’한다. 좌우명도 ‘보더리스(borderlessㆍ경계 없는)’다. 그런 그에게 경계를 친 질문은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다.

뒤떨어진 질문이라 느끼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고싶어하는 이유엔 그가 ‘고졸’에 ‘동대문 출신’이란 엄연한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잘나가는, 모델 같은 외모(스스로 ‘덕 봤다’고 할 만큼)의 젊은 디자이너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가 천편일률적인 성공공식인 번듯한 학력과 ‘빵빵’한 인맥을 가졌더라면 스포트라이트를 적게 받았을지도 모른다. 식상하다 못해 이젠 ‘지긋지긋’해진 두 개의 꼬리표는 그의 태생적 한계이자, 그 한계를 무너뜨릴 무한한 힘이기도 하다.

질끈 묶은 긴 머리(지금은 짧아졌다)에 ‘간지’ 나는 옷차림. 나이 들어 보이려고 일부러 길렀다는 콧수염까지. ‘제너럴 아이디어’ 대표이자 디자이너 최범석(35)이다. 젊은이들의 ‘패션 아이콘’이면서 파격ㆍ도전의 상징인 그를 자신의 사무실과 매장이 위치한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에서 지난 9일 만났다.



“어젯밤 11시에 일본에서 왔어요. 거기다 사업 때문에 아침까지 술자리를…. 휴가 중인데, 쉬지를 못하네요.”

피곤한 얼굴이 미안한 듯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악수보다 먼저 멋쩍은 웃음을 건넨다.

자수성가한 젊은 사장. 고교 졸업 후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시작한 옷 장사였다. 의정부, 부산, 홍대 앞 등을 거쳐 동대문에 입성했다. 20대 중반에 소위 ‘대박’을 냈다. 단지 남들보다 옷을 좋아했고, 더 멋지게 입을 줄 알았다. 장사에도 소질이 있었다. 옷에 대한 정규교육(그는 이 표현을 몹시 싫어한다)을 전혀 받지 않은 그가 만든 옷들이 프랑스, 미국, 일본 등 10여개국에 팔려나간다. 


-디자인이라는 게 학교는커녕 학원도 안 다니고 정말 가능한 일인가요? 아니면 타고난 감각이 출중한 건가요?

▶노래는 꼭 학원 다녀야 부르나요? 춤은 꼭 대학 나와야 추나요? 패션도 마찬가지예요. 정식 교육, 정규교육… 많이들 물으시는데, 그때마다 “당신이 배운 게 당신에겐 정식이고, 내가 배운 게 나에겐 정식”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걸 동대문에서 배웠어요. 원단, 봉제 등등. ‘나는 가수다’의 스타 김범수 씨가 처음엔 음치였다는 사실 아세요? 모든 건 훈련과 노력,깨달을 때가 있어요. 옷도 꼭 감각이 뛰어나야 만드는 건 아닙니다. 너무 뛰어난 사람들은 되레 발전이 없죠. 적당한 콤플렉스와 경쟁구도가 있어야죠. 전 어릴 때 그런 상황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배우고 성장할 기회를 잡은 거죠.



-보통 디자인을 먼저 배운 뒤 옷을 파는데,옷을 팔다가 디자인을 하게 된 건 독특한 경력인데요.

▶소비자가 좋아하는 것을 잘 안다는 거죠. 그건 엄청난 강점입니다. 디자이너는 흔히 바이어 중심으로 생각해요. 전 회의 때도 툭 터놓고 이야기하는 편입니다. “너는 이 가격에 이 옷을 사겠니?”라고. “안 산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면 그 옷은 진행하지 않아요. 한때 ‘내가 만들면 다 팔려’라고 자만한 적도 있어요. 실제로 잘 팔리기도 했고….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공식이 깨졌어요. 그때부터 처음으로 돌아갔죠. 또 먹고살려고 시작했던 장사라,동대문에서의 경험으로 비즈니스 감각을 익혔죠. 요즘 ‘서바이벌 쇼’가 인기인데, 말 그대로 저는 ‘서바이벌’ 현장에서 배웠어요. 



-경계 짓는 걸 싫어한다고 했는데, 디자이너와 사업가 사이의 묘한 경계선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 디자이너로서의 영감,경영인으로서의 철학이나 노하우는 어디서 얻습니까?

▶전에는 특별한 영감을 찾으려고 애썼어요. 정말 별짓 다했다니까요.(웃음) 어느 날은 클럽의 스피커 옆에 종일 앉아 있던 적도 있었죠. 결국 영감도 경험이더라고요. 축적된 게 있어야 생겨나요. 말하자면 더하기보다는 곱하기예요. 계속 곱하다 보면 눈덩이처럼 커지죠. 영감도 여러 경험이 쌓이고, 이어지고, 서로 붙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쉽게 떠오를 때가 있어요. 경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동대문 혹은 그 이전 시절의 경험이 가장 크죠. 책도 많이 보고 경영하는 다른 사람한테 물어도 봅니다. 고(故) 이병철 회장이 삼성 이건희 회장에게 했다는 ‘목계(木鷄)’ 이야기처럼 사람들이 쪼아도 버티려고 해요. 조금 유명세를 타면 좋은, 나쁜 이야기 전부 흘러나오죠.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려고 해요. 저도 닭이 돼 쪼고 다니면, 지는 거예요. 대인배가 돼야죠.



서글서글한 웃음에 경계심이 스르륵 풀린다. 좌우명처럼 그는 경계를 친 적이 없다. 몇 마디 나눠 보니 ‘고졸’이니, ‘동대문’이니 하는 꼬리표는 어느새 떨어지고 디자이너이자 CEO인 인간 ‘최범석’만 남는다.

“이해가 안 가요. 어디 가면 디자이너랍시고 정말 잘해주세요. 제가 만든 옷이 요즘 트렌드랑 맞아떨어진 거죠. 그렇게 대접받을 직업인가 싶어요…. 그냥 옷 만들어 파는 사람이에요. 시대를 잘 타고난 것뿐이죠.”

겸손과 자신감이 함께 묻어났다.



-사업 경력은 오래됐지만 나이에 비해 너무 빨리 성공한 것 아닌가요? 자신감이 넘쳐 보입니다.(참고로 그는 키 180㎝에 69㎏이다)

▶사람들이 외모 덕 봤다고 하죠. 사실, 디자이너 세계에 ‘인물’이 없거든요. 다들 키도 작고. 하하. 농담입니다. 동대문에서 ‘대박’났을 때 실제로 어렸고 동안이기도 해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죠. 생각보다 반응은 좋았어요. 자신감은 딱 한 곳,경험에서 나옵니다. ‘아, 그때도 버텼는데 이걸 못 버텨?’ 해요. 진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지금껏 흘린 눈물이 아깝지 않냐?’고 자문하고, ‘얼마 안 남았어’라며 다독이죠.

10대 후반부터 장사에 뛰어든 건 아주 단순한 이유였습니다. 먹고살려고요. 고등학교 졸업 때 할 줄 아는 게 없는 거예요. 옷은 잘 입는 편이고 또 좋아했죠. 유명해지고 나서 책( ‘세상의 벽 하나를 빌리다’ ‘최범석의 idea’)도 내고, 다른 분야 사람과 새로운 작업도 하니 주변에선 ‘뭐, 그렇게 잘하는 게 많냐’고도 하지만, 사실 아니에요. 옷 만드는 거 외엔 별로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책은 기대보다는 안 팔린 것 같은데….(웃음)



-그래도 패션 공부를 따로 해볼 생각은 없습니까? 혹은 학력에 대한 아쉬움이라든지.

▶패션에서 더 공부할 건 없는 것 같아요. 영화 공부라면 한 번쯤 해보고 싶어요. 학교는 들어갈 생각 없어요. 대학 졸업장? 추호도 없어요. 태어나서 끝까지 읽어본 책이 5권뿐인데요. 하하. 동대문에서 옷만 배웠을까요? 그곳은 당장 옷을 팔아야만 먹고살 수 있는 생존의 현장입니다. 옷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감각을 익혔죠. 그런 배경 덕에 언론 등 세상의 관심도 얻을 수 있었잖아요.

영화는 1~2시간짜리는 관심이 없고, 30초짜리 혹은 10분짜리 영상물,뮤직비디오 같은 걸 만들고 싶어요. 실제 얼마 전에 1분30초짜리 회사 브랜드 영상을 직접 찍었습니다. 무언가를 비주얼로 만드는 일,즉 이미지화하는 작업은 원래 하던 일이잖아요. 패션과 연장선에 있죠. 대사는 가능한 한 없는 게 좋아요. 평소에도 마음에 드는 장면을 많이 담아두는 편입니다. 예를 들어 환풍기가 돌아가는 장면이라든가, 전구가 깜박깜박하는 장면을 아이폰으로 촬영하곤 해요. 책은 사실, 에세이보다는 소설을 쓰고 싶은데… 안 쓰려고 해요. 저를 따르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제게서 희망을 읽고 싶어하지, 제가 만들어낸 오락을 읽고 싶어하진 않거든요.



‘월급 더 안 주는’ 졸업장은 사양하겠다고 했다. 졸업장 없어도 지금 인기 교수(서울종합예술학교)다. 칠판에 무언가를 쓰며 가르치는 일은 아직도 닭살이 돋는다고. 학교도 자주 못 가니 제발 잘라줬으면 좋겠다고 엄살을 부리다가도 “앗, 그것 쓰시면 안 돼요”라고 너스레를 떤다. 자양분이 필요할 땐 훌쩍 떠난다. 영감을 얻는 데에 그 이상이 없다고 한다.

“패션과 여행은 궁합이 잘 맞죠. 패션은 감각도 중요하지만, 경험이 더 커요. 작년엔 프랑스 남부에 다녀왔는데, 헤어진 여자친구와의 마지막 여행이었죠. 이번 9월 뉴욕 컬렉션 테마는 그 여행을 회상하며 준비했어요.” 그의 강렬했던 긴 머리를 싹둑 자르게 한 그 여인이 갑자기 궁금해졌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여행, 음악, 책, 사람… 모든 게 영감의 원천일 듯싶어요. K팝 등의 인기가 ‘패션 한류’에도 어느 정도 작용하나요?

▶어딜 가도 많이 배워요. 별명이 잡초거든요. 인도에 가면 손으로 잘 먹어요. 일본, 유럽 가서도 많이 깨닫고 배웠지만, 뉴욕은 좀 달라요. 정말 재밌어요. 한마디로 짬뽕이잖아요. 이집트에서 살다가 뉴욕에서 대학을 나온 한국인, 일본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학교 다닌 미국인 등등. 저마다 개성도, 취향도 얼마나 다른지…. 그런 게 재밌고, 신 나요. 안에만 있으면 몰라요.

한국 디자인 수준은 아직 높지 않아요. 다만 속도가 빨라 세계가 집중하죠. 얼마 전만 해도 일본과 5~6년 차이 난다고 했는데, 요즘엔 거의 비슷해요. 다만 국내 드라마와 음악 등이 잘 팔리는 것과 디자이너들의 해외 진출은 차원이 달라요. 디자이너들은 먹고살 게 없어서 나갑니다. 국내 유통 시장은 백화점 중심이고, 국내에서 뻗어 나가는 데에 한계가 많죠. 욕심도 있지만, 생존 때문이죠. 물론 외국어 비중이 작아 해외 진출이 수월한 부분도 있어요.



-해외 진출이 필수라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제너럴 아이디어’의 진출 현황은 어떤가요.

▶물론 필수죠. 패션뿐만이 아닙니다. 이제 세계는 일정 수준 이상의 문화를 향유하는 데에 평준화가 된 것 같아요. 물론 뉴욕에서 ‘하이엔드’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 하루에 몇천만원씩 쓰는 그런 경우는 예외죠. 인터넷 때문에 블로거가 강해졌고, 해외 진출이든 뭐든 글로벌화는 꼭 해야 하는 시대인 거죠. ‘제너럴 아이디어’는 현재 10여개국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내수 비중이 훨씬 크지만, 최근 해외 비즈니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형 백화점 S 사와 계약 진행 중이고 일본 백화점에도 곧 들어갈 예정입니다.

보통 10년을 버티면 어떤 사업도 잘된다고 하던데요? 처음 5년까진 성장기였고, 그 후에 정체기, 침체기가 왔죠. 올 초 침체기가 끝나고 다시 성장기에 다다른 단계가 아닌가 생각해요. 대기업 수준까지 키울 생각은 없어요. 국내 시장이 어느 정도 되면, 해외를 공략할 겁니다. 디자인 자체로 해외에서 인정받는 국내 디자이너는 꽤 있지만, 옷을 많이 파는 디자이너는 없어요. 저는 옷을 많이 파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한때 하루 1000만원씩 매상을 올리던 동대문의 젊은 ‘옷 장수’ 최범석 대표. 이제 파리, 뉴욕, 도쿄에서 옷을 판다. 그렇게 영역을 세계로 넓혔지만, 막상 동대문 시절보다 경제적으로 편하지는 않다고 한다. 국내 시장에만 안주하면 따뜻하지 않겠느냐며 주변의 만류도 많지만 당장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다. 동대문에 처음 가게를 내고, 잘되는 가게들에 둘러싸여 혼자 덩그러니 있었을 때도 돈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붐비는 가게 사이로 자신만 투명인간이 된 기분,그 자체가 더 힘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버텼잖아요. 어느 날 ‘탁’ 하고 터지더라고요. 엄청 벌었죠. 해외 진출에 돈이 많이 들고, 몸이 고달파도 괜찮아요. 내가 맞는지, 사람들 이야기가 맞는지는 두고 봐야 알죠.”

사실 그가 동대문에서 이름을 날린 것은 동대문시장이 호황이던 때였다. 지금은 상권이 예전만 못하다. 자칫 그가 ‘희망의 모델’보다는 신화적 존재로만 남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제2의 최범석’이 나오긴 어렵지 않을까요? 젊은 도전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최범석의 희망’은 뭔가요?

▶오히려 쉬워진 거 같은데요? 1977년도에 영국에서 일어났던 펑크 문화가 이제 한국에 생긴 것 같아요. 그건 음악이 아니라 정신적인 거죠. 점점 국내도 온라인을 중심으로 젊은이들이 주류가 되는 시대가 온 듯해요. 가끔 ‘내가 당신을 이겨 보겠다’는 자신감 넘치는 메일도 받아요. 그런 것만 봐도 느껴져요. 다양하고, 재밌고, 개성 넘치는 친구들이 설 자리가 많아지고 있다는 걸. 오히려 제가 걸어온 것보다 더 쉽게 ‘제2’, ‘제3’의 최범석이 쏟아져 나올 겁니다.

저의 조언은 단 하나예요. ‘그냥 계속, 끝까지 하라’. 오래 들러붙어 있었기 때문에 버티고 살아남은 거예요. 한 트레이드 쇼에 처음엔 100명이 나갔다고 합니다. 모두 잘난 사람들이었는데, 3년 뒤엔 70명이 사라지고, 7년이 지나 10년이 되니 단 한 사람만 남았어요. 그 사람은 그 후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벌었다더군요. 10년간 버티고 또 버티는 동안 생긴 노하우, 인프라, 인맥,게다가 경쟁자들마저 사라진 겁니다. 그런 시간이 쌓여 힘이 되죠. 그러니 뭐든 계속하시고요, 끝까지 버티세요. 저도 계속할 겁니다. 제가 잘하는 거 이것뿐이거든요.(웃음)



뚜벅뚜벅, 그가 걸어온 길이 진짜 ‘길’이 됐다. 성큼성큼, 또 한 걸음 앞서 나간다. 어디까지 갈까. 또 저만치 새 길이 보인다.



인터뷰=김형곤 문화부장

정리=박동미 기자/pdm@heraldcorp.comㆍ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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