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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사부일체 반지하서…”

  • 기사입력 2011-05-21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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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000만명이 아는 영화감독, 그는 윤대리였다.

1998년 4월, 서른한 살의 2년차 직장인 윤 대리는 대학시절부터 7년간 사귄 후배와 결혼했다. 신접살림은 경기도 군포 8500만원짜리 23평 다세대주택에 차렸다. 그중 5000만원이 은행대출금이었다. 때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으로 흉흉한 시절. 가전제품 제조업체에 다니던 신부는 결혼 직전 구조조정 대상이 돼 실직했다. 외벌이에 100만원이 조금 넘는 월급으로는 이자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윤 대리는 빚을 모두 정리하고 2년 후 서울 아현동의 2500만원짜리 10평 반지하 전세방으로 옮겼다. 내로라하는 명문대 선후배 사이인 남편과 아내. 서로 얼굴 보기가 민망했고 마주하면 한숨만 나왔다. 다리 끝만 스쳐도 말다툼이었다. 




“이러다간 끝장”이라는 위기의식 속에 다시 2년을 버틴 그는 서울 강남구 역삼동 5500만원짜리 13평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여덟 살과 여섯 살 아들 둘까지 넷이 된 그의 가족은 드디어 37평 아파트를 사서 청담동에 입성한다. 부산에 계시던 홀어머니는 바로 옆 아파트로 모셨다. 마이너스 인생이던 연봉 1800만원짜리 월급쟁이 윤 대리, 10여년 후 대한민국 국민 중 적어도 1000만명이 아는 이름이 됐다. 그에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언젠가는 영화로 만인이 보게 될지도 모르는 윤 대리의 자전적 성공기의 첫 장면은, 예를 들자면 이렇게 시작한다. 기라성 같은 스타들의 얼굴이 번갈아 비춰진 뒤, 카메라가 레드카펫을 거슬러 올라가 화려한 시상식 무대 중앙으로 향하면 주인공의 이름이 호명된다.

“최우수 작품상, 윤제균!”

환호와 스포트라이트 속에 객석에 앉았던 윤제균이 벌떡 일어나고 카메라가 눈물 글썽이는 주인공의 얼굴로 클로즈업하면 그 위로 첫 대사가 흐른다.

“사실 난 감독이 아니었다.”

윤제균 감독 스스로 미리 써본 자전적 극영화의 시나리오 첫머리다.

“휴먼드라마겠죠. 나중에는 꼭 한번 만들고 싶은 이야기인데, 평범했던 샐러리맨이 최고의 영화감독이 되는 이야기예요. 가령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 같은 무대에서 한국인 최초로 작품상이나 감독상을 받는 장면부터 시작하는 거죠. 이게 자전적 영화가 되려면 물론 최고의 감독이 돼야겠죠.”

윤제균(42), 2011년 한국영화계에서 단연 가장 뜨거운 이름이다. ‘두사부일체’ ‘색즉시공’ ‘낭만자객’ ‘1번가의 기적’ ‘해운대’ 등 5편의 영화를 연출한 그는 올해 제작자로서 두 편의 큰 작품을 내놓는다. 7월 21일 개봉하는 ‘퀵’과 8월 4일 뒤를 따르는 3D영화 ‘7광구’. 100억원대 전후의 블록버스터다. 이명세 감독의 액션첩보영화 ‘미스터 K’도 준비 중이다. 자신이 연출하는 프로젝트는 미국 시장 진출을 겨냥한 3D 어드벤처 영화 ‘템플스테이’다. 젊은 감독의 차기작도 윤 감독이 운영하는 제작사 JK필름에 포진해 있다. 영화의 규모와 편수로 보자면 현재 JK필름은 국내 제작사 중 최강이라 할 만하다. ‘1000만 감독’ ‘거물급 제작자’ 윤제균의 인생역전 스토리는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 그 해 칼바람은 매서웠다. 돈 없이 할 수 있는 건 글 쓰는 일밖엔 없었다. 연봉 1800만원짜리 마이너스 인생 윤대리의 아현동 반지하살이가 시작됐다. 해리포터·반지의 제왕 틈 속에서 족보없는 신인감독은 두사부일체·색즉시공으로 대박을 쳤다. 세상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러나… 돈 만원이 없어 골방에 틀어박혔던 순간이 지나갔듯, 세상이 다 내것 같던 흥행시절도 잠깐이었다.


▶‘나는 윤 대리였다’

고려대 경제학과 90학번인 윤제균은 홀어머니를 모신 1남1녀 중 장남으로 대학졸업과 동시에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1996년 두 회사로부터 합격통지를 받았다. 연봉 3000만원 하던 상업은행과 1800만원 하던 광고회사 LG애드다. “연봉은 적지만 삶이 재미있을 것 같아” 광고회사를 선택했다. 하지만 경제학과 출신 신입사원 윤제균은 예ㆍ결산을 주로 하던 전략기획팀으로 발령났다. 일은 힘들었지만 태생적으로 낙천적인 그는 동료들과 저녁마다 나누는 삼겹살에 소주 한잔으로 삶의 즐거움을 찾았다. 그러나 IMF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회사는 비용절감차 전 직원에게 한 달씩 돌아가면서 무급으로 쉬게 했다. 윤제균의 순번은 결혼 4개월 만인 1998년 8월에 왔다. 대출이자를 갚기에도 빠듯한 생활에 월급마저 없는 한 달은 길었다. 버스비며 점심, 담뱃값마저 없어 집에서 실직한 아내와 붙어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다툼의 횟수가 잦아졌다. 이러다간 헤어지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들어간 게 골방이었다.

“돈 없이 할 수 있는 게 글 쓰는 일밖에 없더군요. 시도 쓰고 소설도 쓰다가 안 돼서 포기하고 영화는 원래 좋아했으니까 시나리오를 써보려 했죠. 나만의 영화 한 편을 만들어보자 했던 게 시작이었습니다.”

영화라면 평범한 관객에 불과했던 윤제균이 시나리오에 관해 알고 있던 것 딱 하나. “신 하나당 1분, 120신이면 2시간짜리 영화 한 편.” 골방에 틀어박힌 그는 “하루에 10신씩 일기쓰듯, 12일이면 한 편 완성된다”는 계획을 세웠다. 새신랑 윤제균의 시나리오 소재는 ‘신혼여행’이었다. 그 직전에 회사에서 경비 반액을 지원해주는 단체 신혼여행상품으로 홍콩을 다녀왔다. 잠자리 빼고는 뭇 부부들이 식사, 관광을 모두 함께 하는 단체 신혼여행에선 웃지못할 해프닝이 많았다. 거기에 당시 읽고 있던 법의학 관련 서적의 아이디어가 더해졌다. ‘부부가 신혼여행을 갔는데 신랑이 살해되고 범인은 신혼여행객 중에 있다’는 한 줄짜리 아이디어를 120신으로 풀어냈다.

한 달 후 노트북 속 시나리오는 금방 잊혀졌고, 샐러리맨의 일상은 다시 시작됐다. 그로부터 1년 후 회사 휴게실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있는데 우연히 옆자리에 놓여 있던 영화잡지가 눈에 띄었다. 그중 한 줄이 ‘태창흥업시나리오 공모전, 당선작 3000만원’이었다. 처음 든 생각은 3000만원이면 아내 모르게 결혼 전 대출한 1500만원을 갚을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마감일에 노트북에 잠자고 있던 시나리오를 접수했다. 한 달 후 “윤제균 씨 작품이 대상으로 당선됐습니다”라는 전화를 받았다.

“삼수해서 대학에 입학했을 때보다 기뻤습니다. 영화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요? 아니에요. 체한 것처럼 마음에 얹혀 있던 대출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요.”

회사에 소문이 났다. 사장이 “왜 이런 친구를 전략기획팀에 두느냐”며 드디어 카피라이터로 발령 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제 갓 대리를 단 윤제균의 꿈은 모든 ‘광고쟁이’들과 마찬가지로 독립 광고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벤처 열풍을 만났다. 자고 일어나면 동료 한두 명씩 자리를 떴다. 자리에 뭉개고 있으면 바보 취급을 당하는 때였다. 윤 대리도 신기루가 될지도 모를 ‘대박행’ 기차에 일단 올라탔다. 전략기획팀 근무 시절 ‘네티즌펀드’를 기획해 특허출원을 받은 것이 계기였다. 영화에 네티즌들의 소액 공모를 받아 투자하는 방식이다. 여전히 직급도 월급도 ‘윤 대리’였지만 벤처기업 심마니에서 팀장을 맡아 엔터펀드사업을 진행했다. 2000년 중반이었다. 업무가 업무이니 만큼 영화투자사와 제작사 사람들과 만났다. 시나리오 공모전 입상 경력을 아는 이들이 하나같이 인사치레 삼아 물었다.

“윤 대리, 좋은 시나리오 하나 없어?”

윤제균은 그중의 한 영화사 대표에게 대답했다.

“써놓은 것은 없는데, 쓰려고 하는 것은 있습니다. 조폭이 공부하러 학교에 가는 거에요.”

대학교수인 매제의 이야기를 흘려듣지 않은 덕이었다. 가르치는 학생 중에 ‘(폭력)조직’ 출신인데 손을 씻고 공부하러 온 친구가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사학비리를 접목하면 재미도 있고 시사성도 있겠다 싶었다. 영화사 대표가 “괜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회사는 회사대로 다니면서 매일 퇴근 후 새벽 3시까지, 매 주말 이틀간을 꼬박 시나리오에 매달렸다. 다시 한 달 후 만난 영화사 대표는 “좋다, 투자되면 3000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두 번째 시나리오 계약이었다. 그런데 연출을 맡을 감독도 출연할 배우도 구하지 못해 프로젝트는 표류하게 됐고, 눈앞의 3000만원도 날아가는 듯싶었다. 그때 윤제균은 “제가 감독하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 배수진은 무모하고 막연한 확신이었다. “서른셋, 한번 실패한다 해도 내 인생의 기회는 한 번은 더 돌아올 거야.”

전략기획팀에 있던 실력으로 ‘빵빵한’ 기획서를 첨부했고, ‘데모 테이프’도 만들었다. 2주 동안 ‘대부’ 같은 갱영화 50편을 끊고 붙이고 15분짜리로 만들어 “이렇게 찍겠다”고 했다. 영화사 대표는 “좋다. 믿어보겠다. 너를 위해 투자하겠다”고 했다. 2001년 3월, 윤 대리는 윤 감독이 됐다.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

어린 시절의 윤제균은 넉넉한 집안의 모범생이었다. 1남1녀 중 장남이던 그는 아버지를 닮아 책임감이 강하고 고교 때까지 전교 수위를 다툴 만큼 공부도 잘했다. 한국에서 공부 잘하는 인문계 학생이 그렇듯 그 역시 서울법대 지망생이었다. 하지만 입시에서 연거푸 2년을 낙방하고 삼수 만에 고려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첫 시련은 대학 2학년 때 찾아왔다. 캠퍼스에 봄바람이 살랑이던 3월, 부산으로부터 어머니께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당장 휴학계를 내고 부산으로 내려간 윤제균은 한 달여 아버지를 간호했지만 결국 그해 5월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버지는 상고를 졸업하고 평사원으로 입사해 외국계 가전업체 한국지사의 임원까지 지냈다. 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지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엔 당장 가세가 기울었다. 윤제균은 대학학창시절 내내 과외 아르바이트를 네 탕씩 뛰어가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딱 하나 즐거움이 있다면 대학 2학년 때 미모의 아내를 만난 것이었다. 한 해 후배인 아내 유영이 씨는 신문방송학과였고 단과대(정경대) 내에서 유명한 ‘퀸카’였다. 큰 키에 늘씬한 몸매, 예쁜 얼굴로 입학 때부터 소문이 자자했다. 윤제균은 선배를 졸라 소개팅을 주선받고 인연이 된 이후 그는 “유영이 남자친구”로 더 많이 불렸다. 이때의 경험은 윤제균의 두 번째 영화 ‘색즉시공’의 정서적 바탕이 된다.

“나도 아내도 첫사랑이었고 순진했던 시절이라 인연이 이루어질 수 있었지, 지금 같으면 구질구질한 삼수생 선배와 신입생 퀸카의 만남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윤 감독이 웃으며 털어놓는 고백이다. 그만큼 아내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은 지금도 여전하다. 어려운 시절 두말없이 곁을 지켜준 아내는 어머니와 함께 윤제균을 만든 힘이었다. 윤제균에게 내일이 불투명했을 시절 아내는 네일아트까지 배워가며 내조했다.

군포 빌라에서 ‘신혼여행’ 시나리오를 썼던 윤제균은 아현동 반지하방에서 ‘두사부일체’와 ‘색즉시공’을 탄생시킨다. ‘두사부일체’는 특히 ‘족보 없는’ 신인감독으로선 거대한 성공이라 할 만했다. 2001년 12월 13일 개봉한 이 영화는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 틈바구니에서 350만명을 동원했다. 하지만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윤 감독은 ‘색즉시공’ 시나리오 작업에 돌입한다. ‘두사부일체’의 작가료와 연출료로 받은 4000만원 남짓은 2001년의 연봉인 셈이었고, 바로 2002년의 생계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듬해 12월 13일 개봉한 ‘색즉시공’ 역시 ‘해리포터2’ ‘반지의 제왕2’와 붙었지만 400만명을 돌파하는 흥행을 일궜다.

아직 손에 쥔 것은 별것 없었지만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세상 무서운 것이 없어 보였다. “흥행에선 내가 최고다”는 확신이 따랐다. 이번엔 개봉날짜를 아예 12월 13일로 받아놓고 세 번째 작품에 들어갔다. ‘낭만자객’이었다. 윤 감독은 “‘해운대’보다 힘들었다”고 했다. 세트가 무너져 죽을 뻔했고 개봉일을 맞추려다 무리해서 두 번이나 기절하는 난산이었다. 이렇듯 고생이 컸지만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흥행은 처참한 실패였고, 언론과 평단의 반응은 요컨대 “이 영화는 쓰레기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낙천적이던 윤제균도 견디기 힘들었다.

“운 좋게 잘나가던 놈이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다”는 시선이 싫었다. 돌아보면 웃던 투자자들도 발길을 딱 끊었다. 얼마간 수중에 있던 돈이 다시 바닥을 드러내는 건 익숙해서 참을 수 있었지만 “이제 더 보여줄 것도, 내 재능도 다한 것이 아닌가”라는 회의는 스스로를 나락으로 빠뜨렸다. 재기까지 3년이 걸렸다. 생각하면 자신감으로 알았던 것은 자만심이고 교만함이었다.

이때 그를 구한 건 단 한 줄의 글귀였다.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돈 만원이 없어 골방에 틀어박혔던 순간이 지나갔듯이 세상이 다 내 것 같던 흥행 시절도 잠깐이었다. 지금 어려운 시간 역시 곧 지나가리라. 이번엔 흥행보다 “실패해도 후회스럽지 않은 영화를 만들자”고 마음먹었다. 모두 다 외면할 때 손을 잡아준 배우가 ‘색즉시공’에서 만난 하지원이었다. 철거촌 빈민가의 여성복서를 주인공으로 한 ‘1번가의 기적’은 윤제균에게 평단의 호평과 흥행을 모두 가져다준 작품이 됐다.

‘1번가의 기적’은 260만명을 동원하며 윤제균에게 흥행감독으로서의 위상을 재확인시켰다. 그때 윤제균은 영화감독으로서의 꿈을 비로소 펼쳐낸다. 할리우드에 못지않은 테크놀로지로 재난영화를 만들자는 것이다. 윤제균은 “내 인생의 영화 한 편을 꼽으라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T’”라며 “내게 영화란 상상만으로 가능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비주얼을 펼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해운대’는 1145만명을 동원하며 대성공이었다. 윤제균은 “관객은 ‘하느님’ 같은 존재라서 돈을 벌려고 만든 영화인지 진심을 담은 작품인지 귀신같이 알아챈다”며 “대중들은 선거에서 ‘황금비율’을 만들어내듯 늘 냉정하고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해낸다”고 말했다.

윤제균은 이제 또 다른 기로에 섰다. 샐러리맨의 삶을 포기하고 감독이 됐던 때, 흥행에 실패하고 재기했던 순간에 이어 세 번째쯤의 승부처다. 대작인 ‘퀵’과 ‘7광구’ ‘미스터 케이’에 이어 자신의 여섯 번째 연출작인 ‘템플스테이’의 흥망은 그의 인생 몇 년을 좌우할 것이고, 한국영화산업 역시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윤제균은 “짧은 시간에 밑바닥도 꼭대기도 가봤기 때문에 한번의 성공이나 실패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것”이라며 “무너져도 주저앉아 있지는 않겠다”고 했다. 그는 ‘성공’이라는 단어에 겸연쩍어하면서도 자신의 철학과 소신을 분명히 밝혔다.

“가수 싸이가 한 얘기죠. 성공의 가장 첫걸음은 주제파악입니다. 내가 뭘 잘하고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내 성격과 재능은 어떤지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두 번째, 제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가능하면 35세 전까지는 자신의 재능을 찾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사람들이 100을 기대할 때 200을 보여줘야 한다는 겁니다. 네 번째 그렇게 찾은 일에 자신이 적어도 10년 동안 ‘올인’할 수 있는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인간관계의 원칙은 경제학의 개념입니다만 ‘황금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라는 겁니다.”

휴먼드라마 ‘영화감독 윤 대리’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될 것인가. 그의 도전은 계속된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윤제균의 길

▶출생=1969년 부산, 1남 1녀 중 장남

▶학력=부산 낙민초등-동래중-사직고-삼수끝에 고려대 경제학과 입학 및 졸업

▶가족=어머니, 부인(유영이), 8살ㆍ4살 아들 둘

▶1996년 광고회사 LG애드 입사

▶1999년 재직 중 태창흥업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신혼여행’으로 대상 당선. (2000년 3월 나홍균 감독 작품으로 영화화돼 개봉)

▶2000년 심마니 입사, 엔터펀드닷컴 근무

▶2001년 ‘두사부일체’ 각본-연출로 영화감독 데뷔

▶연출=‘두사부일체’(340만명), ‘색즉시공’(2001년, 400만명), ‘낭만자객’(2002년, 94만명), ‘1번가의 기적’(2007년, 260만명), ‘해운대’(2009년, 1145만명) ‘탬플스테이’(2012년 예정)

▶제작(JK필름)=‘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년) ‘간 큰 가족’(2005년) ‘색즉시공2’(2007년) ‘하모니’(2009년) ‘내 깡패같은 애인’(2010년), ‘퀵’(2011년 7월 예정) ‘7광구’(2011년 8월) ‘미스터K’(2012년)

▶내 인생의 영화: ‘E.T’

▶좌우명: 황금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 상대가 100을 원하면 200만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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