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티스트의 범접할 수 없는 예술의 증명
국립발레단 ‘라 바야데르’ 무대에 선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 무용수 김기민 [국립발레단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중력의 법칙을 거슬렀다. 하늘을 날아오른 그는 좀처럼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비상하고자 했던 ‘인간의 꿈’은 비로소 김기민을 통해 이뤄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소음을 거세한 최고급 12기통 엔진의 슈퍼카처럼 땅과 하늘을 순식간에 질주했다. 새처럼 두 팔을 펴고 뛰어오른 그의 발은 바닥에 닿을 새도 없이 다시 날아오르길 반복했다. 객석엔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마주했을 때의 충격이 함성 안에 담겼다.
지난 1, 3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선 2020년대 이후 ‘최고의 마스터피스’가 탄생했다. 발레계의 두 슈퍼스타인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첫 동양인 수석 무용수 박세은(35)과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최초의 동양인 수석 무용수 김기민(32)이 만나면서다. 두 사람의 무대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명실상부 세계 최정상 ‘월드클래스’. 그 어떤 화려한 수사로도 채울 수 없는 무대였다.
박세은과 김기민의 만남은 국립발레단 ‘라 바야데르’를 통해 성사됐다. 두 사람이 남녀 주인공인 니키아와 솔로르 역으로 캐스팅되자 국내 발레 애호가들은 들썩거렸다. 발레 공연에서도 ‘피켓팅’(피 튀기는 티켓팅)이 재현된 것이다. 세계 무대에서 현존 최고 ‘발레의 신’으로 불리는 박세은·김기민을 한 무대에서 만날 수 있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둘의 무대는 14년 만에 성사됐다. 국제 무대로 나가기 전이었던 2010년 유니버설 발레단에서 같은 작품으로 호흡을 맞춘 것. 이들이 국립발레단 무대에 서는 것은 2009년 ‘백조의 호수’ 이후 15년 만이다.
국립발레단 ‘라 바야데르’로 14년 만에 한 무대에 선 박세은 김기민 [국립발레단 제공] |
강수진 국립발레단 단장의 추진력으로 성사된 박세은·김기민의 ‘라 바야데르’를 보는 것은 관객들에게 ‘축복’이었다. 특히나 마린스키 발레단의 티켓 최고가 주인공인 김기민의 작품을 R석 기준 10만 원에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국립발레단과 함께 한 무대이기에 가능했다. 이틀 간의 국내 무대 티켓은 3분도 되지 않아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국립발레단과 박세은·김기민이 만난 ‘라 바야데르’는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무대였다. 인도의 무희를 뜻하는 ‘라 바야데르’는 아름다운 여성 무용수 니키아와 그의 연인인 용맹한 전사 솔로르, 권력으로 솔로르를 쟁취하는 공주 감자티, 니키아를 욕망하는 승려 브라만의 얽히고 설킨 사각관계를 그린 격정 드라마이자, 발레 테크닉의 정수를 쏟아낸 작품이다. 국립발레단의 ‘라 바야데르’는 볼쇼이 발레단 예술감독 출신인 유리 그리고로비치의 재안무 버전으로 무대에 올렸다.
솔로르는 등장과 동시에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두 다리를 앞뒤로 쭉 뻗으며 날아올라야 하는 화려한 그랑주테 등장신은 이 발레가 향후 보여줄 고난도 기술의 맛보기에 불과하다. 김기민은 ‘라 바야데르’가 요구하는 엄청난 테크닉과 격정적인 드라마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전 세계 유일의 솔로르다. ‘라 바야데르’만 무려 100회 가량 공연한 살아있는 교과서이기도 하다.
국립발레단 ‘라 바야데르’에서 니키아를 맡은 박세은 [국립발레단 제공] |
‘라 바야데르’는 그야말로 볼거리가 넘쳐나는 발레다. 김기민은 “발레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도 발레를 좋아하게 만들 수 있는 작품이 ‘라 바야데르’라고 했다. 1막에서 보여주는 위풍당당하고 강인한 전사 솔로르와 니키아의 ‘사랑의 맹세’ 파드되(2인무)를 시작으로 ‘라 바야데르’는 한눈 팔 새가 없다.
2막으로 접어들면 무대는 공주 감자티와 솔로르의 약혼 연회를 통해 디베르스티아망(프랑스어로 ‘기분 전환’을 뜻하는 말로 이야기의 줄거리와 관계없이 구경거리로 삽입하는 춤)의 진수를 보여준다. 솔로르, 니키아, 감자티의 화려한 테크닉과 드라마를 담은 개인기부터 국립발레단 무용수들의 진가를 볼 수 있는 여러 군무가 속속 자리한다.
단연 압권은 주인공들의 무대다. 니키아 박세은의 춤엔 연인을 보내야 하는 이의 애절한 감정이 스며있었다. 그의 모든 움직임은 슬픔이었다. 첼로 선율을 타고 등장한 박세은의 손끝에서 시작한 감정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시리고 아름다운 사랑은 춤이 되고, 박세은의 몸짓은 음악이 됐다. 니키아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여 자신만의 이야기로 만들면서도 발레 테크닉의 정교함을 놓치지 않았다. 3일 공연의 감자티를 맡은 조연재와 황금신상 김명규의 무대도 훌륭했다. 가볍고 유연하게 날아올라 여유롭게 모든 순간을 보여줬다.
국립발레단 ‘라 바야데르’로 14년 만에 한 무대에 선 박세은 김기민 [국립발레단 제공] |
2막에서 1분간 이어진 솔로르 김기민의 독무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천정을 뚫어버릴 기세의 높은 점프, 빠르고 흐트러짐 없는 공중 회전은 완전히 다른 수준이었다. 압도적인 기량으로 고난도 기술을 완벽하고 가뿐하게 소화했다. 박세은의 이야기가 맞았다. 그는 김기민의 ‘라 바야데르’를 보며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건가 싶었다”고 했다. 관객들은 그와 같은 감정을 공유했다. 그의 독무 내내 8만 명의 관객이 운집한 BTS의 콘서트장에 온 것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고, 독무를 마친 뒤에도 우레와 같은 박수와 고함이 이어졌다. 지휘자가 관객들에게 충분히 박수와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시간을 줬고, 김기민은 1분 이상 박수와 함성을 들었다.
공연의 백미는 3막이었다. 새하얀 튀튀를 입은 32명의 무용수들이 오차없이 만들어내는 백색 발레가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발끝과 튀튀의 각도마저 일치하는 단정하고 흔들림 없는 군무는 국립발레단의 오늘을 증명하는 장면이었다. 솔로르의 환상 안에서 이어지는 3막에서의 독무와 2인무는 특히나 숨막힐 듯 아름다웠다.
국립발레단 ‘라 바야데르’로 14년 만에 한 무대에 선 박세은 김기민 [국립발레단 제공] |
두 사람의 춤은 차원이 다른 예술의 경지였다. 사랑을 잃은 연인들의 사무친 감정은 춤으로 승화됐다. 처절한 감정을 죽음으로 마주한 니키아는 풍화한 슬픔을 발산했다. 아라베스크의 순간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고, 빠르고 정확한 회전은 ‘신의 경지’에 가까웠다. 그러면서도 모든 움직임은 놀랍도록 우아했다. 콧대 높은 프랑스에서 검은 머리의 동양인이 수석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쌓아온 연륜, 탄탄한 기교에 모든 순간 전달되는 감정의 표현에 이르기까지 박세은은 그 스스로 ‘춤’이 됐다.
신들린 박세은의 독무에 이어 김기민이 등장해 비탄에 빠진 솔로르를 그리며 고통의 춤을 춘다. 찢겨질 듯한 감정의 해일은 김기민을 하늘 높이 끌어올려 찬란한 환각을 만들었다. 박세은·김기민이 끝은 아니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32명의 발레 블랑까지 밀어붙이자 ‘도파민 천국’이 열렸다.
범접할 없는 경지, 찬란한 아름다움을 마주할 땐 끝 모를 감동이 밀려온다. 테크닉은 물론이고 강렬한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박세은과 김기민은 1분 1초 솔로르와 니키아가 아닌 적이 없었다. 이 둘이 만나자 ‘라 바야데르’의 서사와 인물들의 복잡다단한 감정선이 온전히 전달됐다.
두 사람의 ‘라 바야데르’는 사실 국내에선 보기 힘든 수준의 무대였다. 그래서인지 손 대서는 안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기분마저 들었다. 비통한 심경으로 가슴을 부여잡은 김기민을 무대에 남겨두고 붉은 커튼이 서서히 닫혀오자 관객들이 아쉬움의 숨을 몰아쉴 수 밖에 없었다. 단 두 번의 공연이었지만, 발레계의 두 슈퍼스타는 순식간에 한국 발레 관객 4600명(이틀 공연 관객수)의 눈높이를 한 차원 끌어올리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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