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병기 선임기자]배우 정려원은 여리여리한 외모에도 선이 굵은 검사,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을 맡아도 잘 어울린다. 이번에도 tvN 토일드라마 '졸업'에서 입시학원 스타 국어 강사인 서혜진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시청자의 몰입도를 높였다.

정려원은 '졸업'의 대본을 읽어보지도 않고 출연 결정을 내렸다. 안판석 감독의 작품을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다.

"안 감독님과 작업을 했던 배우들이 후기가 왜 그렇게 좋은지 궁금했다. 작년 3월에 일기를 쓰면서 함께 작업하고 싶은 작가님과 감독님을 적었는데, 그중에 안판석 감독님이 있었다. 그러다 2개월 후인 지난해 5월 대본을 하나 받았는데 안 감독님 연출에 멜로 장르였다. 그래서 일단 한다고 통보하라고 했다. 대본을 안 읽어보고 결정한 적은 처음이다. 간절히 바라면 오는구나. 이게 운명이구나 생각했다."

정려원은 내 몫이 된 서혜진 역이 당연히 영어 강사일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국어 강사였다.

"어릴 때 호주에서 자라 (제게 온 역할이) 영어 강사일 거라고 생각했다. 국어는 하나도 모르는데 어떡하나 걱정했다. 호주에 있을 때 엄마가 한국 책을 놓지 말라고 하시긴 했다. 그럼에도 내가 너무 뒤에서 출발하는 듯 해 고교 선생인 친구 형부를 통해 한국 국어 교육에 대해 듣고, 국어 책의 좋은 글을 정독하기도 했다."

정려원은 현실적인 국어 강사가 되기 위해 대치동 학원에 가 몰래 강의를 듣기도 했다. 집에 칠판을 가져와 주 2회 판서 연습을 했고, 강의 영상은 수없이 봤다.

"선생이 학생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도 살펴봤다. 인강도 많이 봤다. 특히 김동욱, 강예영, 김젬마 선생님이 하시는 걸 많이 참고했다. 그 전에는 인강(인터넷 강의)과 현강(현장 강의)의 차이도 몰랐다."

학원 강사의 다채롭고 밀도있는 이야기는 이런 노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졸업'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좋은 성적을 얻어, 좋은 대학에 가게 하는 현재 학원의 가르치는 방식과 진정으로 국어를 이해하게 하는, 앞으로 가르쳐야 할 학원의 교수방식의 충돌을 보여줬다. 물론 결국 후자가 승리했다.

"현역 강사들도 이런 본질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봤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시간과 상황에 쫓겨 실천을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드라마는) 이걸 토론하게 만들었다. 대단하다."

정려원은 감독이나 대본 뿐 아니라 현장에 대한 만족감도 드러냈다. 그는 "상대 배우들이 너무 좋으니까. 이런 현장에서 이런 걸 연기해야 이런 맛이 난다는 걸 알았다. 연기 합이 잘 맞았다. (대본에 녹아들어) 준호(위하준 분)를 안좋아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혜진의 알이 깨지는 느낌이었다."

학원 강사라는 커리어 측면 뿐만 아니라 멜로도 돋보였다. 혜진은 일에서는 승승장구했지만 사랑에서는 미결인 캐릭터. 사실 인간으로서 본질적인 것이 충당되지 않았는데, 준호가 그것을 한 번에 해결해줬다.

"혜진의 대사에서 '나한테 미안해하지마. 대신 너가 해줄게 있어.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날 사랑해. 늘 옆에 있으려고 하고, 만지고 싶어하고, 밥 먹이고 싶다고 해줘. 그거면 돼'라는 부분이 있다. 밥 먹이고 일상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만져주고 사랑해주고, 이게 쉽지 않다. (대본에서 그 부분을 보고)작가님은 진짜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극 후반부에 혜진과 준호의 관계가 대치동 학원가에 탄로나면서 혜진의 모든 커리어가 무너지는 위기를 맞은 장면이 나온다. 그때 혜진이 준호에게 했던 이 대사는 내용 자체도 좋았지만, 성숙된 사랑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더 감동적이었다는 게 정려원의 생각이다.

"멜로 (연기)의 공백이 있어 뚝닥거리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혜진은 모솔이며, 젊어서부터 기족을 부양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다. 9부 배드신도 어떻게 찍을지 몰라 고민하기도 했다.(웃음)"

정려원은 이 전에도 유난히 전문직 캐릭터를 자주 맡았다. 그는 "매일 우는 연기는 싫었다”며 “문제 해결을 잘하고, 주체적이며 사람 찌르는 역할을 많이 했다”고 했다. 심지어 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에서 'You're fired(넌 해고야)'라고 말할 때 쾌감을 느꼈다고 회고할 정도다.

정려원이 연기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22살 때 우연히 찍게 된 아침 드라마 덕분이다. 그때 그는 자신이 연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걸그룹이라는 직업은 신기해서 시작하긴 했는데, 좋아하는 지는 모르고 했다”며 “그냥 주어진 일을 하다가 아침 드라마 찍다 평생 직업이 결정났다”며 웃었다. 이후 필모를 늘려가면서 작품마다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걸 느끼며 쾌감을 느낀다.

정려원은 "이번 작품의 대본을 읽다가 과외선생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금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기도 했다”며 “그래서 사제지간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지 않도록 연기했고, 고마움을 느끼는 관계에서 사랑에 빠지는 설정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여러 대사 중 그가 가장 설렜던 대사는 무엇일까. 그는 "'행간 다 읽었죠'라는 대사가 설레게 했다”며 “어쩌면 저렇게 자기 직업 대로 고백을 할까?”라고 말했다.

"혜진을 아직 완전히 떠나보내지 않았다. 좀 있어도 괜찮다. '충분하다.' 이는 연기하면서 내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