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살상무기 금지’ 최고지도자 칙령 번복 우려
하메네이 아들 집권시 혁명 수비대 영향력 확대
지난 6일 이란 테헤란에서 호세인 아미르압둘라히안(오른쪽) 전 이란 외무장관과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이란 핵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AFP] |
[헤럴드경제=원호연 기자]이란 북서부 산악지대에서 발생한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과 호세인 아미르압둘라히안 외무장관이 사망하면서 이란의 대통령과 외교 수장이 한번에 바뀌게 됐다. 급변하는 이란의 권력 구조 아래 대외 강경파가 득세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이란 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 전망도 불투명해지고 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지는 라이시 대통령과 아미르압둘라히안 외무장관의 사망은 이란의 정치체제를 뒤흔들고 이란의 핵 프로그램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이란의 핵프로그램은 규모와 정교함 면에서 급진전하고 있다. 이란은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파기한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에 따라 허용된 농축 우라늄의 27배의 양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60% 농도로 농축돼 있고 약 3개의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양이다. 이란은 더 빠른 원심분리기를 사용하면서 한 달 만에 폭탄 7개 분량의 무기급 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문제는 핵 협상이 파기 되면서 이란이 지속적으로 핵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어디에 어떻게 구축하고 있는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라파엘 그로시 사무총장은 지난 3월 이란을 방문한 이후 “우리는 이란의 원심분리기, 중수, 우라늄 정광의 생산과 비추에 대한 ‘지식의 연속성’을 잃었다”고 우려했다.
이란 이스파한 지역의 이란 핵시설 모습 [로이터] |
그로시 사무총장은 지난 7일 테헤란을 방문해 교착된 협상의 진전 가능성을 타진했다. 이란이 현재 60%로 농축한 우라늄을 더 낮은 농도로 희석할 수 있을지 알아본 것이다.
이달 들어 핵 개발을 고도화하겠다는 정치적 메세지가 연이어 나오던 상황이었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고문인 카말 카라지는 2003년 대량살상무기 개발이 이슬람 율법에 어긋난다는 최고지도자의 파트와(종교 칙령)를 철회할 수도 있다는 발언을 며칠 사이에 두번이나 했다.
다만 이러한 발언이 실제 핵폭탄을 만들겠다는 신호인지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메시지인지 의도가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로시 사무총장은 “압돌라히안 외무장관이나 모하마드 에슬라미 이란 부통령 겸 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이 유사한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점은 그나마 안심이었다”고 전했다.
알리 바게리-카니 신임 이란 외무장관[AFP] |
그러나 이번 헬기 사고로 상황이 급변했다. 사망한 압돌라히안 장관의 뒤를 이은 알리 바게리-카니 신임 외무장관이 서방과의 핵합의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강경파이기 때문이다.
바게리-카니 장관은 1967년 테헤란 북서부 칸 마을의 성직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최고 지도자를 선출하는 임무를 맡는 전문가 회의의 일원이다. 1990년대 외무부에 들어간 그는 외무부 내 보수파인 사이드 잘릴리 핵협상 수석 대표 아래서 차석대표를 지냈다.
사이드 잘릴리와 경쟁하던 온건파인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 집권한 뒤 이란이 비엔나 핵합의에 합의하자 바게리-카니는 협정을 비난하고 나섰다. 이 협정이 핵프로그램에 대한 억제와 엄격한 감시를 허용함으로써 최고지도자의 ‘레드라인’ 을 대부분 위반했으며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철저히 민간용인 만큼 IAEA의 감시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2018년 트럼프 행정부가 핵합의를 탈퇴하고 이란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자 그는 또다시 “협정은 이란이 매우 약하다는 인상을 서방에 줬다”며 비난 수위를 높였다.
2021년 라이시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바게리-카니는 외무부 정무차관 겸 핵협상 수석대표로 임명됐다. 이후 핵협상은 더욱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는 핵합의를 되살리려는 이란 내 움직임에 대해 “이란이 국익을 보장하는 핵심적이고 중요한 도구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재차 맹공을 퍼부었다.
그는 지난 1년 간 오만에서 미국과 비밀리에 간접협상을 벌인 이란 대표단을 이끈 것으로도 알려졌다. 회담에서는 후티 반군의 홍해 선박 공격, 친 이란 무장단체의 미군 공격, 가자지구 휴전 등이 논의됐지만 진전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이처럼 서방에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바게리-카니를 신임 외무장관에 앉혔다는 사실은 하메네이 최고지도자 스스로 서방과의 합의에 부정적이라는 신호가 될 수 있다. 게다가 바게리-카니 신임 장관은 동생이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딸과 결혼한 인척관계로 이란 지도부 중에도 이너서클에 속한다.
더욱이 새로운 대통령 선거에서 서방에 우호적인 개혁파는 출마할 수 없다는 점도 새로운 핵 합의 전망을 어둡게 한다. 이코노미스트는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아들인 모즈타바 하메네이가 정권을 잡을 경우 40년 간 핵 프로그램의 원동력이었던 이란 혁명수비대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문제는 이란의 핵무장을 막지 못할 경우 중동 내 핵 위기는 더욱 고조될 것이라는 점이다. 지난해 9월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이란이 핵폭탄을 개발한다면 사우디아라비아도 그 뒤를 따를 것이라고 확언한 바 있다.
그로시 사무총장은 “북핵 위기의 경우 파급력이 그리 크지 않았지만 중동은 완전히 상황이 다르다”며 “이란이 핵무장에 성공할 경우 인근 국가들은 비확산 시스템이 실패하고 있다고 느끼고 핵무기를 가지려는 유혹을 느낄 것”이라고 경고했다.
why37@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