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 ‘입센 권위자’ 김미혜 번역
연극계 스타 연출가 고선웅 각본ㆍ연출
“2024년에도 유효한 우리 시대의 이야기”
‘스타 연출가’ 고선웅 서울시극단 단장과 국내 최고의 ‘입센 전문가’이자, 15년에 걸쳐 입센 희곡 전집을 번역한 김미혜 한양대 명예교수가 의기투합을 했다. ‘근대극의 아버지’ 헨리크 입센(1828~1906)의 만년 걸작인 ‘욘 가브리엘 브로크만’을 무대로 옮기기 위해서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난 백만장자가 될 수도 있었어! 보르크만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돛단배들이 세계를 누빌 수도 있었어. 대륙에서 대륙을 연결하고. 그 모든게 가능했어.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고!”
건장한 몸을 감싼 유행 지난 양복처럼 찬란했던 과거에 갇힌 남자가 있다. 흩날리는 눈발 같은 은빛의 머리칼, 되돌릴 수 없는 영광을 품고 재기를 노리는 깊고 검은 눈….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은행가로 승승장구하다, 한순간에 몰락한 남자. 8년의 옥살이를 하고, 다시 8년간 은둔 생활을 한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 욘의 곁엔 그를 향한 증오와 환멸을 품은 아내 귀닐과 젊은 날 그에게 버림 받은 귀닐의 쌍둥이 언니 엘라, 연상의 이혼녀와 떠난다는 아들 엘하르트가 있다. ‘눈보라 치는 고독 속에서’(연극 ‘욘’의 부제)도 여전히 허장성세의 시간을 거니는 남자다.
최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연극계의 ‘스타 연출가’ 고선웅(56) 서울시극단 단장은 “단숨에 희곡을 읽고 감동이 밀려와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게 지난해 여름이었다. 고 단장과 국내 최고의 ‘입센 전문가’이자, 15년에 걸쳐 입센 희곡 전집을 번역한 김미혜(76) 한양대 명예교수는 서울 광화문 종로 빈대떡에 앉아 의기투합을 했다. ‘근대극의 아버지’ 헨리크 입센(1828~1906)이 뇌졸중으로 죽기 전 쓴 만년 걸작인 ‘욘 가브리엘 브로크만’을 무대로 옮기기 위해서다.
김 교수의 번역본을 고 단장이 각색, 연출했고 이 작품에 김 교수는 드라마투르그(극작 방향 설계 및 학술 자문)로 참여했다. 김 교수는 1999년 ‘파우스트’를 통해 연극계에 등판한 한국 최초의 ‘드라마 투르그’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잘 맞는 콤비다. “재밌고 이해하기 쉬운 연극, 지루하지 않은 연극”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파트너였다. 고 단장은 김 교수에 대해 “원래 드라마투르그는 원칙이 많은데, 교수님은 엄청 열려 있어서 든든한 뒷배가 돼줬다”고 했다.
고선웅 서울시극단 단장, 김미혜 한양대 명예 교수 [세종문화회관 제공] |
“‘대체 왜’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어요. 대체 왜 이 남자는 8년을 감방에서 살았으면서 다시 또 그 긴 시간 칩거를 했을까. 하필 또 8년 만에 처음 밖으로 나온 날이 눈보라 치는 날이었을까. 왜 그날 산꼭대기에 올라갔을까. 이런 극적인 상황이 너무나 매력적이었어요.” (고선웅)
한국 연극계의 ‘걸출한 재능’인 고 단장이 입센의 작품을 올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시극단에 부임, 2년차를 맞은 그는 지난해 연극 ‘겟팅아웃’, ‘카르멘’을 연출했고, 올해 서울시극단의 첫 작품으로 ‘욘’(4월 2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을 선택했다. 그가 시극단에서 한 해 라인업을 짤 때 가장 첫 번째로 염두하는 것은 극단의 배우들이 드러날 수 있는 작품이다.
고 단장은 이 희곡에 대해 “연극은 ‘배우의 예술’인데 배우들이 돋보이는 독백과 대화, 선명한 캐릭터로 꽉 채워진 옛날 연극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며 “시극단과 딱 맞는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입센은 전 세계에서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많이 공연되는 작품이나 한국에선 ‘인형의 집’, ‘유령’ 등의 작품 외엔 만날 기회가 드물었다. 김 교수가 15년을 매달려 입센 희곡 전편(총 23편, 10권)을 번역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입센이 한국에서 소외당하는 건 제대로 된 번역본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노르웨이어를 독학해 번역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간 한국에선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 중역본 위주로 입센의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1997년 극단 비파·극단 사조가 ‘욘’을 ‘잃어버린 시간 속의 여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작품도 영어 중역본이었다. 입센 번역본 전집이 등장하자, 연극계에서도 입센에 대한 진입장벽이 낮아졌다. 김 교수는 그 공로로 지난해 노르웨이 왕실이 주는 훈장을 받았다. 서울시극단의 ‘욘’은 입센의 작품 중 노르웨이 원작을 한국어로 번역해 올린 첫 연극이다.
국내 최고 ‘입센 권위자’ 김미혜와 연극계 스타 연출가 고선웅이 만난 서울시극단 연극 ‘욘’ [세종문화회관 제공] |
김 교수는 “이 작품은 어느 나라에서나 무대에 올라도 시의성이 있는 작품”이라며 “‘욘’을 무대에 올린다고 했을 때 한국 관객들도 전혀 낯설지 않은 무대가 되리라 확신했다. 고선웅 단장이 용기를 내줘 고맙다”고 말했다.
막상 결정했지만, 고 단장도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고심이 컸다. 고 단장은 “처음엔 겁도 났다”고 돌아봤다.
“입센은 이미 검증이 끝난 사람이잖아요. 제가 아무리 연극을 좀 했다고 해도 더 학습하고 정진해야 하는 희곡인 거죠. 누군가는 입센 연극엔 접근할 줄 모른다 할 수도 있고, 왜 연극을 저런 식으로 하냐 할 수도 있고요. 작품을 결정했으니, 정해진 시간 안에 (방향성을) 종결 지어야 하는 공포도 있었어요.” (고선웅)
김 교수의 번역본을 토대로 고 단장은 수없이 대본을 매만졌다. 입센의 희곡은 고선웅 특유의 짧은 호흡과 맛깔스러운 대사를 입고 다시 태어났다. 그는 “관객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서사만 잘 전달하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작업했다”고 했다.
“상징과 은유가 군데군데 있지만 입센은 절대 고독과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집착을 생애 철학 같은 관점으로 풀었더라고요. 그렇게 어려운 작품은 아니었어요. 그냥 하면 되는 거였어요.” (고선웅)
고선웅 서울시극단 단장, 김미혜 한양대 명예 교수 [세종문화회관 제공] |
한 편의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다.
징글징글한 고독 속에서 또 한 번의 승리를 꿈꾸는 남자 욘, 그런 남편이 수치스러워 아들 엘하르트에게 삶의 전부를 거는 아내 귀닐, 청춘의 한 장면을 공유했으나 욘에게 실연당한 상처를 잊지 못하고 조카 엘하르트에게 집착하는 엘라, 아홉 살 연상의 여인과 떠나겠다고 선전포고하는 아들. ‘이놈의 집구석’ 소리가 절로 나오는 대단한 캐릭터 열전이다.
김 교수는 “입센의 작품은 후기로 갈수록 극작 기법은 리얼리즘이다. 실존의 문제를 건드려 20세기에 나온 모든 OO주의의 아버지라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작품 곳곳에 연출가 고선웅의 체취가 강하게 묻어난다. 과거에 파묻혀 벗어나지 못하고 한 줄기 희망인양 아들에게 집착하는 부모 세대와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행복을 찾겠다며 떠나는 자녀 세대 . 고 단장은 각자의 이유로 ‘절대 고독’을 살아가는 이들의 캐릭터를 극대화하고, 구세대의 관습과 시대착오적 가치관을 현재와 충돌시켜 유머를 심더니, 다시 그 자리에 쓸쓸함을 남긴다.
그는 “이 작품은 우리 인생의 축약본”이라며 “19세기 노르웨이에서 쓴 이야기로 이름도 어려운 사람들이 등장하나, 그들을 영희 철희로 치환하면 적나라한 우리 주변의 이야기이자 여느 집의 소란스러운 명절 풍경이 된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더이상 오를 수 없는 데도 자꾸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사람들이요. 선거철이기도 하지만, 국회의원이 되려 4년을 와신상담하는 사람들,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사람들이요. 우리 삶에 영욕과 몰락의 이야기가 늘 넘쳐나죠. 이 작품엔 인생의 집착도 욕망도 별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가 담겼어요.” (고선웅)
국내 최고 ‘입센 권위자’ 김미혜와 연극계 스타 연출가 고선웅이 만난 서울시극단 연극 ‘욘’ [세종문화회관 제공] |
입센의 무대엔 연출가 고선웅의 연극관도 고스란히 투영됐다. 쉽고 재밌으면서도, 연극성을 살린 무대는 그의 특기다. 김 교수는 특히 “(이 작품은) 우리의 이야기이지만 굉장히 상징적이라 연출가가 상상력을 많이 발휘해야 무대의 그림이 나온다”고 했다.
‘욘’은 관객과 마주한 무대부터 지극히 연극적이다. 욘과 아내 귀닐이 살고 있는 공간은 2층집 설정이나, 한 무대에 평면의 형태로 존재한다. 욘이 머무는 2층의 작은 방과 귀닐의 1층 방이 한 무대에 구분 없이 공존한다. 8년간 층간 소음에 시달린 귀닐이 “내 머리 꼭대기에서, 병든 늑대 한 마리가 왔다 갔다”한다며 기함을 토하면, 욘은 퇴역 군인처럼 귀닐 앞을 걸어간다. 연극만이 할 수 있는 연출에 무릎을 치게 되는 장면이다. 그런가 하면 백색 조명이 켜지고 종이 눈이 휘몰아쳐 만들어낸 설경은 이 무대의 백미다. 각종 영상과 LED 장치로 첨단 기술이 대세를 이루는 때에 고 단장의 무대는 ‘연극의 본질’에 보다 가깝다. 수세기 전의 연극은 이러했을 것이란 확신이 담겼다.
무대 뒤에 거대한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입센은 2024년에도 묻는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냐”고, “인간은 왜 사냐고”고, “우리는 무엇을 좇아야 하냐”고. 김 교수는 “세기가 달라져도 인간에 대한 입센의 질문과 시대 비판, 미래를 내다보는 선구안은 퇴색되지 않는다”고 했다. ‘욘’은 다른 나라, 먼 시간대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 여전히 존재한다.
“고전엔 언제나 우리가 있어야 해요. 우리를 반추할 수 있는 지금 시대의 이야기여야 동시대로 옮겨와도 소구할 수 있죠. 퇴직 이후 무기력해진 아버지, 무너진 집안에서 자긍심을 회복하고자 하는 어머니, 잊혀져야 할 사랑을 잊지 못하는 누군가…. ‘욘’은 일상다반사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이자 동시대의 이야기예요. 여기에 바로 우리가 있어요.” (고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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