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 지우고 인형극 더한 ‘요즘 판소리’
파격적인 듯 해도…옛것과 더 가까워
소리꾼 노은실 [서울남산국악당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는 퍼포머들이 객석 사이 사이에서 한 명씩 일어선다. 기이한 소리들이 쌓여갈 때, 무대 한 가운데에 선 소리꾼이 구음을 시작한다. 판소리 춘향가 중 ‘적성가’ 대목을 가져온 ‘숲(Forest)’. 구구한 이야기도 없고, 메시지를 전달할 가사도 없다. 그런데도 소리에선 지리산의 장엄한 풍경이 그려진다. (‘엠비언트 판소리’ 중)
#2. 생사를 넘나드는 용왕 앞에 토끼 간이라는 ‘만병통치약’을 구하러 육지로 온 자라. 감언이설로 구슬린 토끼를 등에 업고 마침내 바다로 향한다. 날카로운 이빨의 생선 모자를 뒤집어쓴 소리꾼이 구성진 소리로 ”렛츠 고 투 더 씨(Let's go to the sea, 바다로 가자)!”를 외치며 자라와 토끼 인형을 움직인다. (판소리 인형극 ‘수궁가’)
‘판소리’라고 했을 때 으레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한 명의 소리꾼과 그 옆에 자리한 고수. 이 무대에서 소리꾼은 분신술을 거듭한다. 춘향이 되기도 하고, 몽룡이 되기도 하며, 방자와 향단을 오가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 판소리’는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 소재와 형식의 한계를 완전히 넘어섰다. 기존의 다섯 바탕(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흥보가, 수궁가)을 넘어 서양의 고전, 현대 소설로 장르를 확장했다. 덕분에 ‘보편적 서사’를 확보하며 동시대성을 얻었다.
판소리의 변주에 최전방에 선 노은실은 새로운 시대의 소리꾼이다. 그의 판소리는 정의를 내리기 쉽지 않다. 전통의 장르를 지키지만, 그 문법은 완전히 버렸다. 노은실은 그러나 스스로에 대해 “판소리를 하고 있다”고 분명히 규정한다.
그의 판소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관객과 만난다. 하나는 서사를 완전히 덜어낸 독자 장르인 ‘엠비언트 판소리’, 또 다른 하나는 ‘판소리 인형극’이다.
소리꾼 노은실 [서울남산국악당 제공] |
‘엠비언트 판소리’는 ‘상식’을 깬 판소리다. 사실 판소리라는 것은 음악과 이야기가 공평하게 지분을 나눠가진 장르다. 노은실이 구축한 새로운 장르인 ‘엠비언트 판소리’는 기존의 형식과 구성을 모두 파괴했다.
노은실은 “판소리가 가진 것을 지켜야 한다는 매너리즘을 타파해보고자 했다”며 “엠비언트 음악과 판소리가 가진 본질을 병치해 만든 것이 엠비언트 판소리”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첫선을 보였고, 오는 6월 서울남산국악당에서 공연을 앞두고 있는 노은실의 ‘엠비언트 판소리’ 공연에선 그가 만든 여섯 개의 곡을 통해 새로운 판소리의 세계를 연다. 다채로운 이야기가 들어가야 할 자리엔 노은실이 입으로 만들어내는 다양한 소리의 향연이 대신한다. 특별한 의미가 없는 소리인 듯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원초적인 소리는 사라진 서사를 시각화한다.
노은실의 판소리는 자신의 목을 도구로 삼고, 전통을 변주해 새로운 음악세계를 개척했다. 소리꾼의 개인기에 전자 사운드가 어우러지고, 피아노를 비롯한 다양한 악기가 더해진다. 무대 위 오브제와 영상은 엠비언트 판소리에 상상력을 더하는 장치다. 엠비언트 판소리는 한국적인 정체성을 담은 동시에 월드뮤직 장르와도 맞닿는다.
소리꾼 노은실 [서울남산국악당 제공] |
그녀가 소리내는 10분 안팎의 곡들은 ‘친절한 설명’은 없지만, 곡의 분위기와 음악의 흐름을 서사를 상상하게 한다. 제목만 들어도 소리꾼의 메시지가 충분히 와닿는다. 노은실은 자신을 “지팡이로 쿡 찔러주는 역할”이라고 했다.
사실 고어가 범벅이 된 판소리는 요즘 세대나 외국인이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노은실은 “다른 국적의 사람들에게 판소리를 들려줬을 때 그것을 어떻게 듣는지 궁금했다”며 “사실 언어는 중요하지 않았다. 서사를 읊지 않고 하나의 이미지를 함축해 그려내도 관객들은 상상력이 풍부해 더 많은 세계를 떠올린다”고 말했다.
‘판소리 인형극’도 언어의 경계를 넘어선다. 판소리 인형극은 기존의 장르를 새로운 그릇에 담아낸 무대다. 노은실과 체코국립공연예술대학을 나온 ‘오브제 아티스트’ 문수호 감독이 이끄는 극단 목성이 함께 하는 작업이다.
소리꾼 노은실 [서울남산국악당 제공] |
지난달 시드니 페스티벌 무대에서 5일 간 현지 관객과 만난 판소리 인형극 ‘수궁가’는 첼로 연주에 맞춰 자라, 토끼를 비롯해 다양한 오브제로 공연을 꾸며 큰 호응을 얻었다. 심청가를 재해석한 ‘바로크 판소리 심청’은 딸을 잃은 죄책감에 길 위에서 객사한 심봉사를 위로하는 ‘소리굿’ 형태의 인형극을 보여준다.
그의 판소리 인형극이 독특한 것은 이 역시 기존의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인형극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판소리에다 체코의 인형극과 서양 악기인 첼로가 만나 무대를 꾸민다. 이를 통해 판소리를 확장하고, 언어의 한계를 극복했다.
노은실은 “그간의 모든 작업들을 통해 판소리에서 동시대 연극적 언어의 대안을 찾기 위해 고민해왔다”며 “판소리 원형의 형태를 유추했을 때, 지금보다 더 자유로웠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쩌면 제가 하는 판소리는 새로운 판소리가 아니라, 더 원형에 가까운 옛날 판소리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판소리를 기반으로 다른 판소리를 만들되, 나의 언어로 나만의 판소리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