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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남성 창극’에 스타 총출동…1시간 만에 매진된 “탐욕의 막장 드라마”
막장 ‘남성 창극’으로 태어난 ‘살로메’
내달 2~4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창작진 연출 김시화ㆍ작창 정은혜
살로메 김준수ㆍ헤로데 유태평양
2023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된 남성 창극 ‘살로메’의 김준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당신의 목소리는 묘한 향을 흩날리는 향로였어. 당신을 보면 묘한 음악이 귀에 들렸지. 아! 어찌하며 당신은 나를 보지 않았나. 당신은 당신의 신을 보았지.” (오스카 와일드 ‘살로메’ 중)

붉은 달이 차오른 밤, 여섯 개의 욕망이 엇갈린다. 이것은 고작 단 하룻밤 사이의 이야기. ‘은거울에 비친 하얀 장미’(이하 희곡 ‘살로메’ 중) 같은 공주는 ‘석류보다 붉은 입술’과 ‘백합처럼 하얀 몸’을 탐한다. 퇴폐적 욕망과 집착의 끝은 잔혹하다.

오스카 와일드가 빚어낸 ‘탐욕의 서사’가 21세기 한국에서 막장 창극 ‘살로메’(2월 2~4일·대학로예술극장)로 다시 태어났다. 역사상 단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남성 창극’으로다.

이야기 만큼이나 파격적인 설정을 위해 거물급 창작진과 창극계 스타들이 총출동했다. 연극계 ‘스타 연출가’ 고선웅 서울시극단 단장이 각색을, 세계적인 디자이너 이상봉이 무대의상을 맡았다. 국립창극단 간판인 김준수·유태평양·김수인을 비롯해 민간 소리극 단체 ‘타루’의 정보권이 함께 한다.

덕분에 예매 오픈 1시간 만에 5회차 공연 전석이 모조리 팔려나갔다. 지금 공연계에서 가장 뜨거운 작품이다. 개막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오는 4월엔 강동아트센터에서의 공연이 확정됐다. 전국투어 러브콜도 끊이지 않는다.

국립창극단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창극계 스타들이 뭉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다. ‘남성 창극’이라는 새로운 시도 때문이다. 유태평양(헤로데 역)은 “남성창극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는데, 이러한 시도가 함께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라고 말했다. 김준수 역시 “색다른 시도로 5년 안에 상업 창극도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커졌다”고 말했다. 작품의 중심엔 아직 데뷔전도 치르지 않은 젊은 여성 연출가 김시화가 있었다.

2023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된 남성 창극 ‘살로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개막을 앞두고 막바지 리허설 중 만난 김시화 연출가는 “성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때에 전통예술 안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남성 창극을 시도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국립창극단의 ‘귀토’ 조연출을 통해 고선웅과 호흡을 맞췄다.

‘남성창극’이라는 아이디어가 구체화된 것은 고선웅이 지난 2021년 ‘살로메’라는 작품을 제안하면서다. 김 연출가는 “‘살로메’는 탐미적이고 잔인한데 팜므파탈의 매력까지 담은 막장 드라마”라며 “판소리가 가진 비극성이 이 작품과 잘 맞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남성창극’으로 다시 태어나며 원작의 캐릭터의 성별도 다소 달라졌다. ‘얽히고 설킨 인물들의 ‘사랑의 시선’이 집착과 광기의 이중주로 버무려진다.

작품의 최초 원작은 신약 성서다. 세례자 요한을 사랑한 유대의 공주 살로메, 살로메를 사랑하는 양부 헤로데왕과 호위대장 나라보스, 나라보스를 사랑한 시종 메나드(원작에선 여성), 메나드를 사랑한 왕비 헤로디아, 오직 신(神)을 사랑한 요한. 성서 속 이야기는 무수히 많은 예술의 씨앗을 뿌렸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의 오페라가 그 중 하나다. 1905년 초연한 이 작품은 뉴욕 메트 오페라가 27년 간 공연을 ‘금지’하기도 했다.

남성창극과 ‘살로메’의 이야기는 잘 맞는 짝이었다. 김 연출가는 “‘살로메’의 그로테스크함과 남성 배우들이 빚어내는 아우라, 감정을 표출하는 에너지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며 “특히 오페라 같기도 한, 비극성 짙은 작창이 남성들의 음성과 어우러졌을 때 탐미적이고 잔인한 내용이 잘 살았다”고 말했다.

2023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된 남성 창극 ‘살로메’의 유태평양(오른쪽).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여섯 명의 엇갈린 사랑과 욕망이 이끄는 파국은 지독하다. 비극미의 정수를 빚어내는 것은 작창(소리를 만드는 것)이다. 작창가로 함께 한 정은혜는 “판소리라는 재료를 극대화하기 위한 고민이 많았다”며 “젠더의 자유로움을 담은 작품인 만큼 굳이 강조하거나 강요하기 보다 극적으로 들리게 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작창의 근간이 되는 것은 대본이다. 창극에 잘 맞는 대본이 있어야 뛰어난 작창이 나온다. 정은혜 작창가는 “고선웅 선생님 특유의 말맛이 한국적으로 잘 감겨 ‘천일야화’처럼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한 대본이라 사설을 덜어내기 힘들었다”고 했다. 작창에선 장면의 이면에 맞게 다양한 장단을 사용했고, 창극이 많이 쓰는 진양조에도 왈츠의 3박을 가져와 새롭게 표현했다. 태평소, 가야금, 아쟁을 비롯한 국악기와 피아노, 첼로, 일렉트로닉 기타가 어우러진다.

연출부만큼이나 배우들도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다. 인물의 감정 변화에 따라 음역대가 널뛰기를 한다. 정은혜 작창가는 “비극으로 치달을수록 창극 배우가 소화하기엔 어려운 고(高) 음역대가 나오다 보니, 배우들이 음 좀 내려주면 안되겠냐고 할 정도”라고 말했다. 성악가로 치면 테너에 가까운 음역대다.

그럼에도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명실상부 창극계 원톱 배우들이기 때문이다. 유태평양은 “남성들만 있기에 기본 음정 자체는 낮은데, 한 옥타브 반 이상 올라가는 음정이 많아 고생스럽긴 했다”며 웃었다. 김준수는 “반복되는 구조의 선율이 많아 공연을 마치면 관객들의 귀가에 노래가 남을 것 같다”고도 했다.

‘살로메’의 명장면은 ‘일곱 베일의 춤’이다. 일곱 베일만을 몸에 걸친 채 춤을 추며, 한 겹 한 겹 옷을 벗다 나체가 되는 장면이다. 살로메가 추는 4분 분량의 이 장면을 소화하는 주인공은 김준수다. ‘트로이의 여인들’, ‘패왕별희’, ‘내 이름은 사방지’에 이어 여성 역할만 벌써 네 번째다.

그는 “이 작품에선 옷을 벗진 않는다”고 웃으며 “거침없는 욕망을 드러내는 살로메는 이전의 정제된 여성들과 다른 캐릭터다. 심지어 사이코패스 같은 기질도 있어 틀에 벗어난 연기를 보여줄 수 있으리라 봤다”고 말했다. 살로메 역은 김준수와 함께 서울예술단 작품 ‘순신’에 출연한 윤제원이 더블 캐스팅됐다.

국립창극단의 간판으로 ‘베니스의 상인들’의 안토니오와 같은 ‘건실한 주인공’이나 ‘춘향’의 방자 같은 감초 역할의 대명사였던 유태평양은 ‘살로메’를 통해 변신의 발판을 삼는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랑에 집착하는 캐릭터를 해본 적이 없어 흥미로웠다”며 “헤로데는 모든 연기에서 술에 취해있고 미쳐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감정의 진폭이 큰 인물”이라고 귀띔했다.

욕망의 끝은 비극이다. 창극 ‘살로메’는 그 어떤 작품보다 총체적 막장 서사로 향한다. 김 연출가는 “기형적인 욕망들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며 “비극을 맞는 인물들을 통해 집착과 욕망이 넘쳐나는 현대사회에 대한 동시대적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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