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뉴스
  • ‘젊은 치매’ 대책 없는 한국 [젊은 치매를 말하다]
인식 개선·가족 지원 ‘걸음마’
개념 정의마저 불분명한 현실
일본, 사회참여 취업 적극지원
서울 강서구 치매안심센터 내 초록기억카페에는 초로기 치매인이 직접 채소를 길러 음료수를 만들어 제공한다. [강서구치매안심센터 제공]

#. 서울 강서구 치매안심센터 입구에 들어서자 키오스크가 눈에 띈다. 키오스크 앞의 한 남성이 “어떤 걸 드시겠어요?”라고 묻는다. 초록 야채주스를 주문하자 남성이 천천히 키오스크를 누른 뒤 인쇄된 주문종이를 준다. 건너편으로 가니 꽃을 단 검정모자를 쓴 두 명의 중년 여성이 냉장고에서 야채를 꺼내 직접 갈아준다. 중간중간 멈칫하자 옆에 있던 다른 여성이 천천히 순서를 알려준다. 그는 “야채주스 주문하신 분?” 하고 손님을 부른 뒤 종이컵에 담긴 야채주스와 함께 “감사합니다”라며 꾸벅 인사를 건넨다. 현장에서 주문 접수, 음료 제조, 서빙을 담당한 직원은 모두 초로기 치매 환자다.

지난 6일 방문한 서울 강서구 치매안심센터 초록기억카페 1호점. 초로기 치매 환자의 사회 참여와 가족돌봄 부담 경감을 위해 서울시와 강서구 치매안심센터가 지난달 28일부터 시범으로 선보이고 있는 사업이다. 초로기 치매 환자들이 ‘직원’이 돼 직접 채소를 기르고 주스를 만들어 판매한다. ▶관련기사 8면

45~60세 전후에 해당하는 초로기 치매와 관련한 한국의 정책은 초보적인 수준이다. 지방자치단체와 각 지역 치매안심센터 차원에서 초록기억카페와 같은 개별 사업이 진행되지만 초로기 치매 환자 모니터링, 초기 개입, 맞춤형 지원 프로그램, 가족 지원 등 구체적인 대책은 사실상 전무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허윤정 아주대 의과대학 외과학교실 교수는 “한국은 초로기 치매 환자에 대한 개념 정의도 불분명한 상태다. 사회참여활동 지원까지 진행 중인 일본에 비해 상당히 미미한 수준으로, 추진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2020년 수립된 제4차 치매관리 종합계획(2021~2025년)에 담긴 초로기 치매 환자 대상 정책은 초로기 환자 대상 쉼터 프로그램 개발, 정보교류 사이트 개설 등의 수준에 그친다.

반면 일본은 ‘일본 인지증 시책 추진 대강(2019~2025)’의 구체적인 시책 5개 중 1개 항목을 ‘치매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추진 및 조기 발병 치매 환자에 대한 지원·사회 참가 지원’으로 할애해 정책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일본은 지난 2004년부터 ‘어리석다’는 뜻의 ‘치매(痴 )’ 대신 ‘인지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조기 발병(초로기) 치매 환자 지원 내용 홍보 ▷조기 발병 치매 지원 코디네이터 배치 ▷코디네이터 활동 모범 사례 수집 및 지원 체계 연구 ▷개별 상담 지원과 정보 제공 ▷조기 발병 치매 콜센터 운영 ▷취업 계속 지원 사업소 실태 파악 ▷사회교육시설 강좌 수강 등 배움을 통한 지역사회 참여 촉진 등을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실제 일본은 광역지방자치단체에 해당하는 도도부현 홈페이지에 ‘청년 치매’ 카테고리를 만들어 상담, 지원, 코디네이터제도 등을 안내한다. 일본은 특히 초로기 치매 환자의 사회 참여를 적극 장려한다. 일본의 공적 직업소개소인 헬로워크는 치매인을 위한 취업 지원 서비스도 운용한다. 헬로워크는 각 도도부현 노동국이 운영하는 창구다. 일반인, 외국인은 물론 치매인에게도 직업 소개, 고용보험, 실업대책 등을 안내한다. 치매인을 고용한 이력이 있는 회사를 안내하고 지역 장애인직업센터 등 다른 기관과 연계해 지원한다.

한국도 초로기 치매인을 사회로 끌어내기 위한 인식 개선 캠페인, 초로기 치매인과 가족 맞춤형 서비스 제공 등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김성윤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초로기 치매 원인은 크게 조발성 알츠하이머, 전두측두엽 치매로 나뉜다. 다른 치매에 비해 진행속도가 빨라 조기 개입이 중요하다”며 “하지만 초로기 치매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시기를 놓친다. 적극적으로 사회에 관련정보를 알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중장기적으로 사회활동, 취업활동을 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허 교수는 “장애인 활동 지원 서비스가 제공된다면 초로기 치매인은 직업활동도 일정 기간 가능하다”며 “일자리 제공을 통해 초로기 치매 환자가 삶의 의미를 찾고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이 계획돼야 한다”고 했다. 이어 “사회 참여 과정에서 부정적인 낙인이 찍히지 않도록 인식 개선 프로그램도 동시에 운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강선옥 강서구 치매안심센터 총괄팀장은 “주문을 받으면서 사람들의 표정을 읽고 의사소통을 하는 것도 고도의 인지활동”이라고 설명했다. 초록기억카페에서 일하는 초로기 치매 환자 엄모(58) 씨는 “처음에 치매라는 걸 알았을 때는 집 밖으로 나오는 것도 싫었다. 지금은 일을 하기 위해 센터에 나오는 것이 기대된다”고 웃었다. 한모(60) 씨는 “예전에 식당 같은 곳에서 일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일이 많이 어렵지 않다. 이곳에 오면 기분이 좋아진다”며 감사함을 전했다. 강서구 치매안심센터는 하반기 운영 결과를 바탕으로 초로기 치매 환자의 자기효능감, 만족감, 우울도 개선 등 성과를 측정해 서울 전체에 확산을 유도할 방침이다.

김 교수는 초로기 치매치료제 개발을 위해 연구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지난해 노인성 치매와 관련해 만들어진 기초·임상연구 레지스트리(TRR·Trial Ready Registry) 시스템을 초로기 치매에도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국내 연구자들과 환자들로 구성된 일종의 통합 데이터 플랫폼이다. 김 교수는 “초로기 치매 환자를 치료하고 연구하는 의사 간 네트워크이자 신약 개발, 진단 및 치료, 예방 신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준비된 그룹”이라고 설명했다.

박지영 기자

park.jiyeong@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