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밀리건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이게 진짜예요?"
1977년 미국 오하이오. 국선 변호인은 정신병원이 보낸 빌리의 감정 결과서를 보고 경악했다. "그러니까, 여기 쓰인 10명이 다 빌리 몸에 있는 인격이란 말인가요?" "네, 저희도 놀랐어요. 하지만 진단 결과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변호인은 수화기를 내려놨다. '하나는 모두, 모두는 하나….' 변호인은 애국 표어에나 쓰일 법한 말을 중얼댔다.
지난 10월27일. 빌리는 대학가 연쇄 성폭행 사건의 용의자로 붙잡혔다.
이상했다. 용의자가 혐의를 부인하는 일은 부지기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빌리는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또, 수시로 말투와 행동을 바꿔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어떤 때는 울보 어린아이 같았고, 어떤 때는 냉혈한 사막의 용병 같았다. 변호인은 고민 끝에 그를 정신병원으로 보냈다. 진단을 받게 했다. 그리고 이날, 결과서를 본 것이다.
"빌리. 아니 그… 지금은 누구죠?"
변호인은 빌리를 조사실로 부른 뒤 앉혔다. "지금은 아서입니다." 기절초풍할 노릇이군. "아서니, 레이건이니 하는 게 다 연기가 아니었어요?" "네. 지금 저는 아서가 맞습니다. 빌리의 몸속에 있는 수많은 인격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지요." 빌리가 호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빌리는 어디에 있어요?"
"이 상황이 두려워 숨었습니다." "당신은 빌리 대신 어떻게 등장할 수 있는가요?" "빌리의 몸속에는 커다랗고 흰 스포트라이트가 있어요. 모든 인격은 거기에 빙 둘러서서 쳐다보기도 하고, 침대에 누워 자기도 해요. 그러다가 누구든 스포트라이트 그 자리에 올라가는 사람이 세상에 나가는 겁니다. 빌리가 하도 저를 보채서 나온 것…"
그렇게 차분하게 있던 빌리는 말을 멈췄다.
눈빛이 바뀌었다.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안경이 불편한지 휙 벗어 던졌다.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변호인이 감정 결과서를 꺼내 휙휙 넘겼다. "지금은 울보, 대니?" "선생님은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영국식 발음이 섞인 딱딱한 말투가 사라졌다. 무방비한 소년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대니라고? 아니, 대체 내가 뭘 보고 있는 건지." 변호인의 동공이 커졌다. 함께 앉아있던 다른 변호인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빌리 밀리건. [넷플릭스] |
쾅!
이번에는 빌리가 두 주먹으로 나무 책상을 세게 쳤다. 나무가 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레이건?" "이봐. 어린아이는 그냥 둬. 대니는 잘못한 게 없어." 이번에는 슬라브어 억양이었다. "미치겠군." 변호인은 짧은 순간 빌리 몸에 있는 아서, 대니, 레이건 등 3명의 인격체를 마주한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아서가 돌아왔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10번 인격 에이달라나를 부추겨 성범죄를 저질렀다고요?"
"네. 에이달라나가 조금 전에 다 실토했습니다." 변호인은 이미 본 게 있는 만큼, 빌리의 말을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아서의 인격이 깃든 빌리는 다시 영국식 억양을 구사했다. 변호인은 빌리의 몸에서 에이달라나가 등장하길 기다렸다. "제가 그랬어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행했어요. 죄송합니다." "에이달라나에요?" "네." 빌리가 쭈뼛댔다.
'1955년에 태어난 빌리는 3살 때부터 계부에게 성폭행과 고문 수준의 아동학대를 겪었습니다. 이에 극단적 시도를 했었는데, 그쯤부터 그를 구하려고 10개의 분리된 인격이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변호인은 감정 결과서의 맨 뒷면을 천천히 읽은 뒤 한 자도 빠짐없이 암기했다.
변호인은 법정에 섰다. 빌리의 병에 대한 여러 심리학자와 정신과 전문의들의 소견을 내밀었다. 법정이 술렁였다. 끝내 빌리는 10년의 치료 감호와 무죄 판결을 받은 뒤 풀려났다. 일종의 심신미약 상태로 인정된 것이다. "(나의 무죄는)동정심에 의한 선고가 아니에요. 누구나 저와 같은 일을 당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빌리의 말이었다.
빌리는 그렇게 병원으로 들어갔다.
유명해진 빌리는 각종 출판과 영화 제작 제의를 받았다. 그는 재판 이전에는 설명하지 않은 14명의 인격을 추가로 말하기도 했다.
1977년 성폭행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빌리 밀리건(오른쪽)과 그의 변호사 알란 골즈베리의 모습. [콜럼버스 디스패치] |
빌리의 무죄 판결과 그가 만든 추가 인격을 놓고 의학계와 법조계 등에서는 거듭 논란이 일었다.
코넬리아 윌버 등 당시 저명한 전문가들이 빌리를 다중인격자로 ‘인증’했다. 그러나 그를 호의적으로 보는 이는 많지 않았다. 빌리의 몇몇 행동도 미심쩍었다. 특히 유고슬라비아어를 할 줄 안다고 한 빌리의 한 인격은 그 말을 익힌 의사와 만날 때만 되면 틀림없이 사라졌다. 수사 관계자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사법부가 빌리에게 지나치게 많은 면죄부를 줬다. 그 사이 피해자들이 잊혔다"는 말도 나왔다. 빌리의 가족마저 "훗날 빌리가 추가로 말한 새 인격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인격"이라고 증언했다. 빌리의 지인들은 그가 스스로를 자주 '소시오패스'로 칭했고, "나는 질환 때문에 처벌받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빌리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빌리의 변호를 맡았던 알란 골즈베리는 2015년 그리스 아테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빌리는 그림을 독학했고, 주로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의 아이들을 그렸다"며 "미국의 한 여성에게 그의 그림이 1만달러(약 1130만여원)에 팔렸다. 다만 빌리가 그린 아이들이 그의 다중 인격 중 하나인지, 그가 상상한 아이들 모습인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심리 검사 당시 빌리가 그린 그림과 서명들. 그림체와 글씨체 등이 다 다른 모습. [넷플릭스] |
빌리는 10년의 치료를 마치고 퇴원했다. 1991년 8월부터는 더 이상 다중 인격 장애를 겪지 않는다고 인정받았다. 그는 2014년 12월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의 한 요양원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빌리 사례가 재차 수면위로 떠오른 건 다중인격장애 일종인 해리성 정체감 장애(DID)를 앓는 프랑스 한 유튜버가 최근 고통을 호소한 데 따른 영향이 크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영국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올림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유튜버 릴리(23)는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올해 말 조력 사망을 진행하기 위해 벨기에 의사들과 접촉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릴리는 2020년부터 자신의 일상이 담긴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고 있다. 구독자 25만명 이상의 유튜버다.
릴리는 한 몸에 자신과 함께 루시, 제이, 찰리 등 4개 인격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릴리가 DID를 앓게 된 건 빌리의 사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릴리는 최근 한 프랑스 방송에서 "청소년 시절 5차례 이상 성폭행을 당했다. 7년간 20번 파양 당했다"며 "학창시절에는 집단 괴롭힘의 대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릴리는 빌리와는 전혀 다르게 살았다. 릴리는 루시, 제이, 찰리 등 어떤 자아도 나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힘써왔다. 당연히 범죄의 늪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는 다만 "삶에 지쳤다"는 취지로 '조력 사망'을 원한다고 했다. 그는 인스타그램에서 "더 이상 나를 감당하기가 어렵다"며 "내 고민과 과거, 내 뇌에 너무 지쳐있다. 내 인생이고 내가 내린 결정이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했다.
조력사망은 의사결정능력이 있는 환자가 치료가 불가능한 질병으로 고통받을 때 환자가 사망을 앞당길 수 있는 약물을 의사에게 처방받아 사망에 이르도록 하는 일이다. 다른 이름은 '존엄사', '안락사' 등이다.
〈참고 자료〉
빌리 밀리건(스물네 개의 인격을 가진 사나이), 대니얼 키스, 황금부엉이
빌리 밀리건, 24개의 인격을 가진 남자,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