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도 닫힌 듯이 열려있는 알파벳 'C'처럼…
홍은상가, 작은 집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작업방식 참신” 2021년 젊은 건축가상 수상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홍은상가’ 외부 모습 [임준영 작가 제공] |
[헤럴드경제=양영경 기자] 붉은 벽돌의 다가구·다세대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선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는 주변 집들과 비슷한 듯 다른, 3층짜리 건물이 좁은 골목 한 켠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붉은색으로 칠한 건물 전면부, 층당 20평이 채 안 되는 작은 규모는 인근의 집들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이 건물은 남다른 존재감을 자랑한다. 다른 집에선 찾아볼 수 없는 몇 가지 장치 덕분이다. 외벽에는 건물 전체를 가로지르는 2개의 기둥이 배치됐다. 건물의 붉은 외벽과 대비되는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해 형태가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층마다 길고 넓게 배치된 창, 다소 널찍한 난간 살 간격 등은 테라스가 없는 건물에 개방감을 더한다.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홍은상가’ 외부 모습 [임준영 작가 제공] |
이곳은 바로 ‘홍은상가’. 1층은 이세웅·최연웅 소장이 함께 운영하는 ‘아파랏.체 건축사사무소’이고 2층은 세입자, 3층은 이 소장 부부가 생활하는 공간이 들어선 건물이다. 최근 홍은상가에서 만난 이 소장은 “작은 집도 도시 한가운데서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서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설계했다”면서 “건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웅장함을 더해 작은 집에는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요소만 어울릴 것이라는 편견을 깨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홍은상가는 첫눈에 반하는 건물이라기보다는, 두 번 세 번 뜯어볼수록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일명 ‘볼매’(볼수록 매력적인)에 더 가깝다고 이 소장은 설명한다. 작은 건물 곳곳에 의외의 요소를 배치해 다시 들여다보게끔 한다.
실내 공간도 그렇다. 3층에 위치한 집은 작은 방이 쪼개져 있을 것이란 예상을 깼다. 탁 트인 주방 겸 거실과 침실 1개, 화장실 1개로 구성됐다.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어느 한 공간은 넉넉해야 답답함을 피할 수 있다는 게 이 소장의 생각이었다. 보통의 작은 집들이 시도하기 어려운 ‘과감함’이다. 그는 “오늘 봐도, 내일 봐도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재미가 없다”며 “처음 봤을 땐 몰라도 서서히 매력이 드러나는 건물이 더 파괴력 있지 않나”라고 했다.
이세웅(좌)·최연웅(우) 아파랏.체 건축사사무소 공동대표 [아파랏.체 건축사사무소 제공] |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홍은상가’ 내부의 모습 [임준영 작가 제공] |
이 소장은 대학 동기인 최 소장과 독일 유학까지 같이 다녀와 지난 2013년 건축사사무소인 ‘아파랏.체’를 차렸다. ‘아파랏.체’는 독일어로 ‘도구’, ‘장치’를 뜻하는 ‘아파랏’(apparat)과 알파벳 ‘c’의 합성어다. 듣는 사람이 바로 의미를 파악하기 쉽지 않고 되묻게 되는 이름에 더 가까운 편이다.
누군가에게 쉽게 각인되지 않는 이름은 이 소장이 의도한 바다. 그는 “이름의 의미가 먼저 전달돼 사무소의 정체성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차라리 이름을 들었을 때 스쳐가는 소리처럼 들리길 바랐다”면서 “보이지 않는 가치를 끌어내는 도구로 예술을 활용한다는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이 와 닿아 독일어 중 ‘도구’를 사용한 것”이라고 했다.
‘c’를 붙인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총 24개 알파벳 중 ‘닫힌 듯하면서도 열려 있는’ 형상이 특별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이 소장은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그래 보이면서도 안 그래 보이는 것, 누군가는 열렸다고 누군가는 닫혔다고 이런저런 해석을 낳을 수 있는 작업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닫힌 듯 열린 듯한 오묘함은 홍은상가에서도 드러난다. 홍은상가는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필요에 따라 변모할 가능성을 남긴 건물이다. 당초 용적률을 최대로 뽑아 4층까지 올릴 수 있었으나 일부러 낮춰 3층을 택했다. 이웃집과 눈높이를 맞추고 당장 필요치 않은 공간은 보류했다.
건물의 옆과 뒤와는 달리 붉은색을 칠한 데다 표면도 매끄럽지 않은 전면부는 어디가 건물의 얼굴, 즉 열린 공간인지를 알려준다. 이 소장은 “이 골목길에서도 홍은상가는 얼굴이 있는 건물”이라며 “예전에는 도시를 걸어다니면 건물마다 얼굴을 보는 재미가 있었지만, 지금은 얼굴이 사라진 건물이 더 많아 아쉬움도 있다”고 했다.
경기 파주시 단독주택 ‘파주뜰’ 외부 모습 [진효숙 작가 제공] |
경기 파주시 단독주택 ‘파주뜰’ 내부 모습 [진효숙 작가 제공] |
이 소장은 그간의 프로젝트 중 ‘고깔집’(2014년)과 ‘파주뜰’(2017년)에서의 경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꼽았다. ‘아파랏.체’의 직전 사무실은 연남동 작은 골목가에 위치한 ‘고깔집’이었다. 주사위 형태의 건물 위에 고깔 하나가 자연스럽게 얹혀진 듯한 5층 건물이다. 이 소장은 운 좋게 지인의 다세대주택을 설계한 다음 그 건물에 입주해 2018년까지 지냈다.
채광이 강조되고 흰색의 마감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그는 ‘밝음’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됐다고 언급했다. 그는 “‘밝다’, ‘어둡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면 단어가 가진 선입견 때문에 당연히 밝게 만드는 것을 선택했었다”면서 “하지만, 지나친 밝음이 오히려 피로감을 더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그다음부터는 안락함을 선사하는 어두운 공간을 꼭 배치하려고 한다”고 했다.
경기 파주에 자리 잡은 2층짜리 단독주택, ‘파주뜰’에선 건축주가 ‘사생활 보호’를 강조한 만큼 외부와의 관계가 차단된 상태에서도 내부는 얼마나 풍요로울 수 있는지 보여줘야 했다. 이전보다 더 많은 고민은 물론 더 다양한 재료도 활용해야 했다. 이 소장은 “파주뜰은 가족들이 주택 1층에 모여 밥도 먹고 취미도 같이 하고 잠도 함께 자는 ‘가족의 공간’이 가장 중요했는데, 현대 사회로 들어오면서 개별적인 공간에서 이뤄지던 것을 모두 합쳐야 한다는 고민이 있었다”면서 “한두가지가 아닌 10개, 20개의 퍼즐 조각을 맞춰가는 작업이었다”고 회고했다.
지난해 ‘아파랏.체’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젊은 건축가상’을 거머쥐며 그간의 성과를 인정받았다. ‘기이함’에서 역설적으로 현대 한국사회의 정서가 느껴지며 작업방식이 참신하다는 평을 받아, 수상한 3개 팀 중에서도 1등 격인 ‘올해의 주목할 팀’으로 선정됐다. 이에 대해 이 소장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생태계가 건강하려면 여러 종이 필요한데, 그런 의미에서 상을 준 것 같다”면서 “앞으로도 매끈하고 반짝이고 가늘고 얇고 가벼운, 주류가 원하는 방식을 거부하고 크고 무겁고 두껍고 다소 투박하더라도 우리만의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길을 가겠다”며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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