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령 개정 추진했으나 관계부처 제동
[헤럴드경제=배문숙 기자]공정거래위원회가 외국인도 대기업집단 동일인(총수)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관련 시행령을 개정할 계획이었으나, 부처 간 이견으로 재검토를 진행하기로 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상 최혜국 대우 조항 위배 가능성 등 통상 마찰 우려를 불식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다.
31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공정위는 다음 주 초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산업통상자원부, 외교부, 기획재정부와 개정안 내용 및 향후 추진 일정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동일인은 기업집단을 사실상 지배하는 자연인(총수) 또는 법인으로, 대기업집단 규제를 적용받는 기업의 범위를 정하는 기준이 된다. 대기업집단 총수로 지정되면 대기업집단 지정을 위한 자료 제출과 공시 의무를 지고, 총수 일가 사익편취 규제도 적용받는다. 허위 자료를 제출하거나 누락하는 등 법을 위반하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공정위는 이번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에 외국인도 일정한 요건을 충족하면 대기업집단 총수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하는 동일인 정의·요건 규정을 담을 계획이었다.
지난해부터 대기업집단에 진입한 쿠팡의 김범석 이사회 의장이 국내 쿠팡 계열회사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명백한데도 총수 지정을 피하고 있는 것을 두고 특혜 논란이 일자 연구 용역을 거쳐 제도 개선안을 마련한 것이다.
공정위는 쿠팡 등 특정 기업을 타깃으로 시행령을 개정하는 것이 아니며 외국인 동일인 지정을 위한 각종 세부 요건을 개정안에 담았기 때문에 통상 분쟁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봤다.
그러나 산업부는 공정위가 마련한 시행령 개정안이 한미 FTA 최혜국 대우 규정에 어긋나는지 검토가 필요하고, 외국 자본 국내 투자 유치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5월 1일 지정된 대기업집단 76곳 가운데 동일인이 법인인 '총수 없는' 대기업집단은 총 11곳이다. 쿠팡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의 자회사가 최대 주주인 에쓰오일, 미국계 제너럴모터스 그룹의 한국지엠 등 다른 외국계 기업집단도 여기에 포함된다.
공정위의 시행령 개정에 따라 김범석 의장은 총수로 지정되지만, 에쓰오일 등은 총수가 지정되지 않는다면 최혜국 대우 조항 위배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앞서 미국도 이런 부분에 대해 우려를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재부 역시 사안의 민감성을 고려할 때 공정위가 시행령 개정을 서두르기보다는 산업부·외교부 등과 사전 협의를 마친 후 입법 예고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공정위는 내년 5월 1일 대기업집단 지정에 반영하기 위해 되도록 연말까지 시행령 개정을 마치겠다는 목표를 세운 상태지만, 부처 간 이견이 계속되면 이는 어려워질 가능성도 있다.
윤석열 정부 국정과제인 동일인 친족 범위 축소 역시 덩달아 차질이 생길 수 있다. 공정위는 동일인 친족 범위를 현행 혈족 6촌·인척 4촌에서 혈족 4촌·인척 3촌으로 축소하고 일정한 요건을 충족하는 사실혼 배우자는 새롭게 친족 범위에 추가하는 내용도 이번 시행령 개정안에 담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선 시행령을 입법 예고한 뒤 관계부처 협의를 이어가거나, 친족 범위 축소와 외국인 총수 지정을 위한 시행령 개정을 별개로 추진하는 방법도 있다. 이번 시행령 개정 연기를 두고 사실상 '수장 공백' 상태에 있는 공정위가 부처 간 협의 사안에서 한계를 드러냈다는 평가도 나온다.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은 새 정부 출범 전 사의를 표명했지만, 후임이 석 달째 임명되지 않고 있다. 국무회의에는 윤수현 부위원장이 대신 참석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