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세월 뛰어넘어 신구 배우 조화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아, 춥다! 뼈가 시리게 추워!”
‘천둥 같은 목소리’가 울린다. 여든의 노배우 박정자의 대사는 훤하디 훤한 연습실의 낮을 새까만 밤으로 뒤바꾼다. 연극은 ‘죽음’의 문을 연다.
“이제 산 자는 잠에 들고” (박정자), “죽은 자 눈을 뜨는 때”(길혜연), “깊은 물로부터, 타는 불로부터”(윤석화), “젖은 대지로부터, 탁한 대기 속에서”(손봉숙), “무언가 떨어져 나온다. 어릿어릿 희뜩희뜩!”(윤석화)
연극 ‘햄릿’이 돌아왔다. 한국 연극계의 대모인 박정자를 필두로 무데 위에서 긴 역사를 만들어온 굵직한 여성 배우들이 짧게 토막낸 대사를 주고 받는다. 한 마디 한 마디의 무게가 차오른다. 존재의 힘이 강력하다.
50년의 긴 세월을 뛰어넘든 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6년 만에 돌아오는 연극 ‘햄릿’(7월 13일부터,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디데이를 맞아가는 지금도 배우들은 맹연습에 한창이다.
6년 만에 돌아온 연극 ‘햄릿’ [신시컴퍼니 제공] |
이 연극은 여러모로 면면이 화려하다. 가히 ‘인간 문화재’ 급이라 할 수 있는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배우 권성덕·전무송·박정자·손숙·정동환·김성녀·유인촌·윤석화·손봉숙 등 6년 전 ‘햄릿’에 주요 배역으로 참여했던 배우들이 총출동해 조연, 단역으로 함께 했다. 여기에 강필석이 햄릿, 박지연이 오필리어, 박건형이 레어티즈를 맡았고, 김수현 김명기 이호철과 같은 젊은 배우들도 함께 했다.
손진책 연출가는 “선배들은 무대에 서는 자체로 힘이 배우 신진 배우들은 그 힘을 이어받아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햄릿’은 신구 세대가 새로운 앙상블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한 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은 이들이 함께 한다는 것은 배우들에게도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6년 만에 돌아온 연극 ‘햄릿’ [신시컴퍼니 제공] |
배우 전무송은 개막을 앞두고 “보다 높은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며 “여기 계신 배우들이 모두 문화재급의 귀한 분들인데,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극계의 큰 나무인 ‘선생님 배우’들은 적은 대사와 비중에도 남다른 감정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이번 연극에선 박정자를 비롯해 한국 연극계의 뿌리 역할을 한 여성 배우 손숙 윤석화 길해연 손봉숙이 유랑극단의 배우 역할을 맡아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다.
손숙은 “조연이 아니라 단역이다. 대사가 단 일곱 마디 밖에 없어 매일 아침 다섯 시간씩 연습실에 앉아 있다”며 “일곱 마디로 관객을 울려야 하는데, 사명감도 생기도 겁도 난다”고 말했다. 손숙의 이야기에 손진책 연출가는 “이 연극은 극중 배우들이 열고 닫는다”며 “단역이 아니라 중역이다”라고 강조했다.
6년 만에 돌아온 연극 ‘햄릿’ [신시컴퍼니 제공] |
6년 전 햄릿을 연기한 유인촌은 이번엔 햄릿의 숙부인 클로디어스 역을 맡아 악역을 선보인다. 66세까지도 ‘햄릿’을 연기해온 그는 “어떤 배우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역할은 달라진다”며 “강필석의 젊은 햄릿을 기대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젊은 배우들과 함께 연기하며 우리가 너무 올드해보이지 않나 싶어 걱정스럽다”며 “젊은 배우들은 요즘 스타일인 반면 우린 그렇지 않다. 연습을 해가며 맞춰가고 있다”고 말했다.
강필석은 “선생님들이 먹을 것을 많이 사줘 큰 힘이 되고 있다”며 “육체적으로 힘든 작품이지만 선생님들의 격려 덕분에 조금은 수월하게 연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필리어 역할도 세대교체가 됐다. 6년 전 윤석화가 했던 이 역할은 박지연이 맡고 있다. 윤석화는 “볼 때마다 기특하고 예쁘다”며 “연기의 디렉션이 6년 전 공연과 달라졌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너무 잘해 함께 호흡하는 것만으로 기쁘다”며 벅찬 마음을 전했다.
손진책 연출가는 “한국 연극을 계속 지켜온 선배들과 같이 한다는 것이 너무나 든든하다”며 “연극에 대한 모두의 믿음이 관객에게도 그대로 전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