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시장에 미치는 영향
고물가·저성장 기조 당분간 불가피
금리·가계부채·주택수급여건 등 변수
물가 오를땐 안전자산 선호 현상도
인기지역 중심 ‘양극화 현상’ 심화
정부 규제완화 부양책도 살펴봐야
2008년 아시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해 주목받았던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경제학과 교수가 요즘 외신에 부쩍 많이 등장합니다. ‘닥터 둠(비관론자)’으로 유명한 그는 “앞으로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 고물가)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해당하는 이야깁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스테그플레이션에 진입했다는 진단도 나옵니다. 저성장(Stagnation)과 고물가(Inflation)가 결합된 스태그플레이션은 물가는 상승하는 데 경제성장률은 하락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최근 한국경제연구원 주최로 열린 ‘스태그플레이션 진입 가능성 진단과 정책방향’ 세미나에서 “한국에선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이 결합된 스태그플레이션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미 수치도 비슷한 흐름이 보입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6월 새정부 경제정책방향 합동브리핑을 통해 “올해 한국의 경제 성장률을 2.6%로 하향 조정하고, 소비자물가 전망은 4.7%로 대폭 상향”했습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곧 6%대 물가상승률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새 정부에서 물가상승률이 경제성장률을 보다 높다고 전망한 겁니다.
역사적으로 물가상승률이 경제성장률 보다 높은 시기는 1970년대와 1997년 IMF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외에 없습니다. 지금 상황이 그 정도로 위기라는 뜻입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미증유의 퍼펙트 스톰이 밀려올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주택수요 감소 vs ‘에셋파킹’= 우리나라 국민의 자산 중 부동산이 자치하는 비중은 약 80% 수준이나 됩니다. 스테그플레이션이 심화하면 부동산 자산은 어떻게 될까요? 경기침체가 본격화하면서 집값에 악영향을 줄 것이란 관측이 많습니다. 경기악화 상황에선 실업자가 늘고 소비가 악화됩니다. 금리가 오르면서 대출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주택 수요는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으론 물가가 급등하는 시기엔 안전자산 선호 현상으로 부동산을 사려는 수요가 늘면서 오히려 오른다고 분석하는 전문가도 있습니다. 투자자들 사이에 ‘에셋파킹’(asset parking)이란 말이 부각되는 게 대표적 사례입니다. 물가급등 시기에 오를 자산에 투자(파킹)하면 향후 더 많은 부를 챙길 수 있다는 기대입니다. 최근 강남 고가주택이 신고가를 경신하고, 초고가 오피스텔이나 생활형숙박시설이 단기간 완판 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어떤 판단이 맞을까요? 전문가들이 현재 상황을 물가 상승폭이 경제성장률 보다 높았던 1970년대와 1997년 IMF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비교합니다. 앞서 언급한 루비니 교수는 이번 글로벌 경제상황에 대해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었지만 부채 수준이 높지 않았던 1970년대, 채무위기에 이어 디플레이션(경기침체)을 경험했던 2008년 스타일이 결합한 ‘스태그플레이션적 채무위기’”라고 정의했습니다.
무슨 소리일까요? 스테그플레이션의 부동산 효과는 시기별로 조금 다릅니다. 먼저 1970년대엔 전세계적으로 두 차례에 걸쳐 3~4년씩 비교적 긴 기간 스테그플레이션이 진행됐습니다. 중동전쟁으로 인한 1·2차 ‘오일쇼크’가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1차 오일쇼크가 시작된 73년 이후 6~7년 사이 원유 가격이 8배나 폭등했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은 연간 물가상승률이 20% 전후로 급등하는데,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해가 많았습니다. 우리도 비슷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으로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지진 않았습니다. 대신 물가가 연간 20% 이상 폭등(74년 24.3%, 75년 25.2%, 80년 28.7%, 81년 21.4%)해 서민 경제에 커다란 충격을 줬습니다.
▶70년대 스테그플레이션, 부동산값은 올라=이 시기 부동산시장은 어땠을까요? 의외지만 미국 집값은 오히려 올랐습니다.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실질주택가격 변동률은 77년, 78년에도 5~6%씩 뛰었습니다. 영국이나 일본 등에선 실질 주택가격이 많이 떨어졌지만 국가마다 온도차이가 컸습니다.
한국은 당시 공식적인 집값 통계가 없어 확인하기 어렵지만 일시적인 하락 이후, 폭등했다는 기록이 더 많습니다. 한국에선 당시 강남 개발이 한창이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와 한남대교 개통, 공업단지 개발로 전국적으로 부동산 개발 붐이 일었습니다. ‘복부인’이 등장하고, ‘부동산투기’가 본격화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땅값 통계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지가동향 자료에 따르면 1975~1980년 사이 전국 땅값은 매년 11.7%~49%씩 뛰었습니다. 이 기간 서울에선135.7%(78년) 폭등한 해도 있었습니다.
원자재가격이 폭등하고, 인건비도 오르는 시기였기 때문에 개발업자들은 분양가를 마음껏 높일 수 있었습니다. ‘분양가자율화’ 시대였습니다. 강남에서 아파트 고분양가 논란이 처음 시작된 시기가 그때였습니다.
1997년 IMF외환위기는 전세계적인 현상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남아 일부 국가가 여전히 잘나가던 선진국으로부터 돈을 빌려야 했던 지엽적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시적인 외환부족으로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돈을 빌리면서 공기업 민영화, 대기업 구조조정, 강력한 은행 대출 규제를 받았습니다. 실업률은 급증했고 대출금리는 20% 이상으로 혹독했습니다. 1998년 한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5.1%인데, 물가상승률은 7.5%나 됐습니다.
집값은 엄청난 타격을 받았습니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1998년 전국과 서울 아파트값은 -13.6%, -14.6% 변동률을 기록했습니다.
당시 상황은 일시적 외환 부족 상태에 따른 위기였기 때문에 회복은 빨랐습니다. 1999년 경제성장률은 11.5%, 물가상승률은 0.8%로 안정을 찾았습니다. 집값 하락세는 1998년 딱 1년만이었습니다. 1999년엔 전국 아파트값이 8.54%나 오르더니 2000년 1.38%, 2001년 14.55% 등 상승세를 이어갔습니다.
▶장기 부동산 침체가 시작된 2008년=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부터 촉발된 2008년 금융위기는 전세계적인 위기를 몰고 왔습니다. 대규모 부실 대출로 무리하게 집을 샀다가 파산하는 가구가 급증하면서, 실업자가 늘고 기업이 줄줄이 도산했습니다. 당시 상황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디플레이션’으로 변화했습니다. 물가 하락과 경제 침체가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는 그 시기 커다란 위기를 겪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폭등했던 집값과 급증한 가계부채가 경제에 부담이 됐습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그해 7월 “한국경제의 스테그플레이션 가능성이 OECD 국가들 중 가장 높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디플레이션에 가깝다고 진단하는 전문가들이 늘어났습니다. 당시 경제성장률은 2008년 3%, 2009년 0.8%로 쪼그라드는데, 물가상승률은 각각 4.7%, 2.8%로 낮아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디플레이션은 부동산엔 더 치명적입니다. 통화량이 축소되면서 소비는 정체되고 물가가 하락합니다. 기업의 도산, 실업자 증가, 주가와 부동산 하락 등의 연쇄효과가 생깁니다.
2006년 13.75%나 급등했던 전국 아파트값은 2008년(2.3%) 이후 본격적으로 하락합니다. 특히 서울은 장기 하락 추세를 보였습니다. 2006년 한해만 24.11%나 폭등했던 데서, 2007년 3.57%, 2008년 3.21%, 2009년 2.58%로 위축되더니, 2010년엔 -2.19% 변동률을 기록하며, 결국 마이너스로 돌아섰습니다. 하락세(마이너스 변동률)는 2013년까지 4년간 이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스테그플레이션과 부동산 가격의 상관관계는 경제 여건에 따라 다릅니다. 채무 위기가 없고 고용이 안정되던 1970년대는 안전자산이란 인식이 확산되면서 오히려 더 올랐습니다. 가계부채가 심각하지 않았던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엔 잠시 주춤했을 뿐 곧 반등했습니다.
부동산이 꽤 긴 기간 실질적인 타격을 입은 건 2008년 이후였습니다. 스테그플레이션이 디플레이션으로 넘어가면서 경기침체가 이어졌습니다. 당시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아무리 부양책을 써도 집값 하락세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서울 아파트값은 2010년부터 2013년까지 4년간 매년 -0.44~-4.48% 변동률을 기록했습니다.
▶여전히 변수가 많은 주택시장= 지금 상황은 어떻게 봐야할까요? 1970년대와 비슷하다는 진단도 있고, 2008년 디플레이션으로 넘어가기 직전과 유사하다는 전문가도 있습니다.
70년대와 비슷하다고 보는 사람들은 오일쇼크와 최근 코로나19,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사건으로 인한 ‘공급발 물가상승’이라는 점, 급격한 금리 인상이 필요한 통화 긴축의 시기라는 점, 중동과 러시아라는 지정학적 긴장이 심화하고 있다는 점 등을 꼽습니다.
물론 “유가가 단기간 6배 이상이나 올랐던 70년대와 최근 1.6~1.7배 수준 상승세와는 비교도 안된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도 있습니다. 70년대엔 가계부채 문제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안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2008년 상황은 현재와 꽤 비슷하다고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상황이 특히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현재 상황을 노무현 정부가 끝나고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던 때의 데자뷔 같다”고 하더군요.
앞선 정부에서 집값이 너무 많이 올랐다는 점, 글로벌 경제위기가 심각해지면서 금리인상을 통해 유동성을 회수하는 시기라는 점, 집값은 높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거래량이 줄고 있는 거래소강 상태라는 점 등에서 그렇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현재 상황이 꼭 2008년 이후처럼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현재 상황은 엄청난 물량의 2기신도시 입주가 시작된 2008년의 주택 수급 여건과 많이 다릅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인허가 물량이 줄어 향후 2~3년간 수도권 주택 공급은 대폭 감소할 전망입니다. 특히 서울은 2024년까지 입주량이 현재의 3분의1 토막으로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새로 주택공급을 적극적으로 늘릴 상황도 아닙니다. 최근 급등한 원자재가격으로 분양원가가 올랐고, 금리상승으로 프로젝트파이낸싱(PF)도 힘들어 건설업체들이 공급에 적극 나서기도 힘듭니다.
올 8월부터 계약갱신청구권 만료 물량이 시장에 나오면 전셋값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관건입니다. 전셋값 급등세가 현실화하면 집을 사려는 수요가 새로 나타날지 주목됩니다. ‘에셋파킹’ 현상으로 인기지역을 중심으로 주택수요가 몰릴 수 있습니다. 지역에 따라 침체되는 곳이 있지만 오르는 지역은 계속 오르는 ‘양극화 현상’은 더 심화할 겁니다.
금리인상이 조기에 종료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경기침체 신호가 커지면 미국을 비롯해 각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더 이상 올리지 않고 내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정부의 각종 규제완화 부양책이 주택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봐야 합니다.
어쨌든 주택시장엔 지금 커다란 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박일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