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장애인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 4월 19일, 장애인인권법센터 대표가 페이스북을 통해 농촌진흥청에 뜻밖의 편지를 띄웠다.
농촌진흥청 누리집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 토종 밀( ‘앉은뱅이 밀’, 지금은 ‘앉은키 밀’로 부른다) 품종 이름이 장애인 비하 표현이라며 바꿔 달라는 요청이었다. 아는 분 중에 지체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있는데, 이 단어를 들으면 자신들의 처지를 빗대어서 하는 말인 것 같아 마음 아파한다는 사연도 덧붙였다.
사실 ‘앉은뱅이 밀’이 공식 이름은 아니다. 언제 그 이름을 갖게 됐는지도 분명치 않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민간에서 널리 쓰이다가 자연스레 이름으로 굳어진 경우다. 하지만 굳이 이런 사실을 따질 필요도 없이 김 대표의 의견은 존중받기에 충분했다. 장애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편견이 없는지 돌아봤다. 순간 마음이 바빠졌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데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먼저 농촌진흥청에서 관리하는 모든 누리집에 ‘앉은뱅이 밀’이 검색되지 않도록 해당 내용을 지웠다. 동시에 앉은뱅이 밀 대신 쓸 수 있는 품종 이름도 찾기로 했다.
밀의 재배와 육종을 담당하는 국립식량과학원 주도로 청 내부 토의를 거친 끝에 마땅한 이름을 정했다. 바로 ‘앉은키 밀’이다. 품종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예전 이름과도 동떨어지지 않아 만족스러웠다. 새 이름이 통용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미 예전 이름에 익숙해져 있는 재배농가나 유통망을 설득해 새 이름을 쓰도록 권해야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새 이름이 지어진 배경을 이해한다면 분명히 환영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토종 밀(‘ 앉은키 밀)이 세계 식량 자급률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일반 밀보다 키가 작고 대가 단단해 거친 바람에도 잘 쓰러지지 않아 수확량이 많다. ‘앉은키 밀’은 1900년대 일본으로 건너갔고, 미국의 육종가 노먼 볼로그 박사가 일본에서 찾은 앉은키 밀 품종과 멕시코 재래종을 교잡해 다수확이 가능한 신품종을 탄생시켰다. 이 신품종 덕분에 인도와 파키스탄의 밀 수확량은 최대 60%이상 늘어났고, 10억 인구가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먼 볼로그 박사는 197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출발이야 어찌됐든 ‘앉은키 밀’로 촉발된 작은 논란은 국가기관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한 농촌진흥청의 언어적 감수성을 가늠해보는 기회가 됐다.
농촌진흥청 누리집과 정보서비스에 올려져 있는 자료를 대상으로 장애인 비하 용어가 어느 정도 쓰이고 있는지를 조사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제공하는 언론보도 준칙 매뉴얼에 포함된 61개 비하 용어를 검색해 봤다.
점검 결과, 장애인 비하 용어 24건이 걸려졌다. 대부분 유전자원 이름에 장애인 비하 용어가 포함됐거나 문장에 들어 있는 서술어가 부적절했다. 이 가운데 ‘앉은뱅이’는 ‘앉은키’로, ‘불구’는 ‘부상’으로 바로 용어를 수정하거나 일부는 삭제했다. 나머지는 단어 검색이 안 되도록 처리했다.
한 가지 밝히고 싶은 것은 토종 유전자원 명칭이나 학술적 명칭(학명·종명)은 오랫동안 널리 사용되어 온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특정 기관 단독으로 변경하거나 수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농촌진흥청은 점차 유전자원 관련 학회나 단체에 생물명이나 학명 등에 부적절한 용어가 포함됐을 경우 변경을 요청할 계획이다.
장애인의 인권과 복지 수준은 그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앉은키 밀’이 쏘아 올린 장애 인권 감수성이 사회 전체로 번져가길 바란다. 변화는 거대한 담론이 아닌 작은 실천에서 시작한다.
김두호 농촌진흥청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