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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풍같은 ‘속주’ 몰아치는 마지막 4분...늘 그 순간만 생각나죠”
120분 음악극 ‘포미니츠’ 진두지휘 두 주역
박재현 음악감독·피아니스트 조재철 인터뷰

박재현 음악감독
“불가능한 도전 같던 작품,
삶에 찌들어 힘든 누군가에
희망의 씨앗 되었으면...”

피아니스트 조재철
“무대위 배우와 같은 호흡으로
가야 하는 것, 쉽지 않았죠
연습, 또 연습뿐...”
‘포미니츠’에서의 음악은 다른 뮤지컬보다 더 특별하다. 음악은 또 하나의 주연 배우이자 그의 스토리를 온전히 담아낸 드라마다. 피아노 연주는 주인공의 감정과 심리 상태를 대변하고, 120분을 휘감는 음악들은 작품의 기승전결을 보여준다. ‘포미니츠’의 조재철(위) 피아니스트와 박재현 음악감독. 박해묵 기자

우아한 그랜드 피아노 앞에 선 주인공은 광기 어린 몸짓으로 허공을 향해 건반을 두드렸다. 행위예술처럼 이어지는 배우의 몸짓에 서린 분노가 손가락 끝에 닿으면 무대 왼쪽으로 핀 조명 하나가 떨어진다. 또 다른 피아노 앞에 앉은 연주자는 무대 위 배우의 이야기를 거친 타건으로, 격렬한 선율로 들려준다. 전력질주하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그것 자체로 대사이자 스토리다. 무대 아래 오케스트라 피트에선 키보드와 드럼, 기타가 폭풍 같은 음악의 깊이를 더하며 극을 진두지휘한다. 이 무대의 숨은 주역, 박재현 음악감독과 피아니스트 조재철이다.

2006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무대로 옮긴 뮤지컬 ‘포미니츠’(5월 23일까지, 정동극장). 작품은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들어온 열여덟 천재 피아니스트 제니와 여성 재소자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크뤼거의 이야기를 담았다. ‘포미니츠’에서의 음악은 보다 특별하다. 음악은 또 하나의 주연 배우이자 그의 스토리를 온전히 담아낸 드라마다. 피아노 연주는 주인공의 감정과 심리 상태를 대변하고, 120분을 휘감는 음악들은 작품의 기승전결을 보여준다. 매순간 음악 속에 사는 전문가들이라도 ‘음악’이 주인공인 작품 앞에선 중압감이 만만치 않았다.

한창 공연 중인 정동극장에서 만난 박재현 음악감독과 조재철 피아니스트는 “음악이 굉장히 중요한 작품인 데다 마지막 신이 너무나 강렬하게 남아 부담이 컸다”고 입을 모았다.

제목이 준 힌트처럼 ‘포미니츠’에선 마지막 4분(슈만 피아노 협주곡 A단조)의 연주가 일종의 ‘킬포’(킬링 포인트)다. 영화에선 이 장면 하나만을 위해 나아가듯 갈등과 드라마를 쌓는다. 박 감독은 “마지막 4분 영상을 100번 정도는 봤다”며 깊은 숨을 뱉었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 한 사람의 피아니스트만으로는 나오기 힘든 사운드였어요. 다른 악기의 도움을 받아볼까 고민했는데, 오히려 이질감이 들더라고요. 어떻게든 둘이 해보자 싶었어요.”(박재현) 무대 위에선 조재철이 피아노를, 무대 아래에선 박감독이 키보드를 연주하는 것으로 120분을 책임져야 했다. “마지막 4분 악보를 가장 먼저 받았어요. 악보는 두 개 버전이었는데, 대충 훑어볼 땐 괜찮겠다 싶었죠. 그런데 도무지 사람이 칠 수 없는 버전이 있더라고요.”(조재철) “인간의 힘으로는 나올 수 없는 속주”(박재현)를 요하는 ‘4분’의 악보에 소위 ‘멘붕’(멘탈붕괴)이 왔다. “공연을 하는 지금도 늘 4분의 연주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 4분을 보기 위해 오는 관객들도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조재철)

피아노 극인 만큼 배우들도 공연 6개월 전부터 박 감독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무대에서 짧게나마 연주를 하거나 손바닥으로 리듬을 치는 등 퍼포먼스도 나오기 때문이다. “감독님은 대치동의 일타 강사처럼 뮤지컬 배우들의 전문 피아노 선생님으로 불려요.(웃음)”(조재철) 박 감독은 ‘포미니츠’는 물론 현재 공연 중인 또 다른 작품 ‘그레이트 코멧’에서도 일 년간 두 남자 주인공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계 이름을 하나하나, 악보에 깨알같이 적으면서 레슨을 시작했어요. 한 번 레슨할 때 네 마디씩 배웠어요. 손가락 안무 하듯이 ‘두 번째 내려봐’ 하면서요.” (박재현)

피아니스트에게 가장 큰 난관은 배우와 호흡을 맞출 때였다. 공연의 막이 오르기까지 이어진 무수한 연습과 리허설이 지금의 조화를 이뤘다.

조재철은 제니와의 완벽한 합을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본능적인 감각이 필요했다. “손가락 근육이 알아서 돌아갈 만큼 연습을 해놓고, 제니들의 연주에 맞춰 따라가는 것에 포커스를 뒀어요.”(조재철) 게다가 연주만 해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처음엔 피아노만 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리허설마다 뭐가 하나씩 추가되더라고요. 마지막 4분의 연주에선 현을 뜯기도 하고, 손으로 피아노를 치고, 발을 구르는 안무까지 생겼어요.(웃음)”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제니의 감정이 두 사람(조재철, 제니 역의 배우)의 듀엣으로 이어진다. 격렬한 연주로 억대 가격의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혹사 당하자, 공연 후 관객 사이에선 “브랜드 로고만 붙여놓은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안 그래도 피아노를 막 다뤄야 하니 문의를 해봤어요. 그런데 대여하는 것보다 로고만 붙이는 게 더 비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대여를 했죠. (웃음) 일주일에 한 번씩 조율하면서 쓰고 있어요.”(박재현)

갑작스러운 순간도 있었다. 퇴장곡의 연주는 공연 직전 저녁식사 자리에서 결정됐다. “마지막 4분을 연주한 뒤 퇴장곡 없이 공연을 마치려고 했어요. 4분의 여운을 관객들이 이어가는게 어떨까 싶었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허전하더라고요. 그래서 급하게 악보를 뽑아 연주하게 된 거예요.(웃음)”(박재현) “지금도 퇴장곡을 칠 때 가장 떨려요. 극 중에서 한나 역의 배우가 치는 곡이기도 하고요. 피아니스트이니 더 잘 쳐야 한다는 부담과 공연의 여운을 마지막까지 가져가야 한다는 압박이 함께 오더라고요.” (조재철) “기교가 화려하지 않아도 섬세한 곡들이 더 어렵고 떨리거든요.”(박재현) 반응은 역시나 좋았다. 관객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기 위해 자리를 뜨지 않는다.

박 감독은 피아노를 연주해야 하는 제니와 교도관 뮈체 역의 배우들을 어르고 달래고, 사기를 북돋우며 불가능한 도전을 이어갔다. 그는 농담처럼 “내 아이를 키우는 마음으로 가르쳤다”고 말했다. “다들 너무나 힘들어했어요. 자기 뜻대로 안 되니 울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요. 손톱은 다 깨지고 물집이 잡히는 건 예사고요.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게 중요해요. 처음부터 동영상을 찍어서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줬어요.”(박재현)

묵직하게 이어지는 극 안에서 음악으로 쓰는 드라마가 주는 카타르시스는 ‘포미니츠’의 가장 큰 매력이다. 박 감독은 “극은 어둡지만, 삶에 찌들어 힘들어하는 누군가가 본다면 희망이 씨앗이 돼줄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 중심에 피아노가 있다. “‘포미니츠’의 주인공은 피아노예요. 뮤지컬에서 관객들에게 피아노 치는 사람은 늘 반주자였는데, 이 작품을 통해 배우와 함께 호흡하는 존재라는 걸 보여주게 된 것 같아요.”(조재철)

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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