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칼럼] 역사 속 전염병 대응법

2020년 1월 20일 우리나라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나왔다. 1차 충격은 1월 29일까지 계속된다.

2월 18일 신천지교 대구교당을 중심으로 집단감염 사태를 맞는다. 2차 충격으로부터 21일째인 3월 9일 서울 구로구 콜센터 직원들을 중심으로 집단감염을 확인한다. 3차 충격이라고 할 만하다. 전 세계 주가도 큰 폭으로 떨어진다.

이탈리아 11.69%, 미국 6.10%, 일본 5.07% 이어서 우리나라도 4.19%나 떨어진다.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WHO)는 팬데믹을 선언한다. 감염병 위험 6단계 중 최고 단계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는 ‘드라이브 스루 선별진료소’라는 새로운 검사 방식을 개발했다. 신속하게 검사할 수 있으면서도 감염 위험이 적다. 매일 두 차례 온 국민에게 상황을 알리고 있다. 처음부터 현재까지 축소하고 감추기에 급급한 일본과는 선명하게 대조된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조선에서 가장 무서운 전염병은 ‘두창(천연두)’이었다. 흔히 마마라고 부르는 질병이다. 1790년 진하사 수행원으로 북경에 다녀온 박제가는 ‘인두종법(人痘種法)’이라는 책을 가지고 온다. 박제가는 인두종법을 응용해 수묘법(水苗法)을 개발한다. 두창 딱지를 물에 불려서 균을 더 약화시킨 뒤 그 바이러스를 성한 사람에게 사용함으로써 안전하게 예방하는 방법이다.

정약용은 ‘마과회통(麻科會通)’(1798)에서, 최한기는 ‘신기천험(身機踐驗)’(1866)에서 우두법을 다룬다. 박제가의 인두법은 사람에게서 바이러스를 추출한 것인 데 반해 정약용이나 최한기는 소에게서 추출한 것이다.

1821년 조선에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한다. 1859년 다시 창궐한다. 조선 조정에서도 서양 의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1895년 세 번째로 호열자가 창궐한다. 궁내부대신 유길준이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서 고종 임금의 시의를 맡았던 에비슨(Oliver R. Evison)에게 콜레라를 막아 달라고 부탁한다.

에비슨은 방을 붙여서 백성들에게 콜레라 대처 요령을 알린다. 위생부를 조직해 체계적으로 콜레라 방역에 나선다. 환자를 격리 수용한다. 콜레라 환자들은 계속 구토를 하면서 결국 탈진해 사망한다는 것을 알아낸 에비슨은 생리식염수를 피하에 주사하는 치료법을 개발한다. 혈액 탈수를 방지하고 원활하게 순환되도록 함으로써 콜레라를 이겨내도록 돕는 방식이다. 생리식염수 정맥주사 치료법의 원조다.

전염 예방과 치료를 위해서는 바이러스를 갖고 있어야 한다. 1904년 에비슨은 제중원에서 바이러스 확보에 나선다. 토끼를 사육해 바이러스를 주입한 뒤 척수를 뽑아내서 보관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매일 한 마리씩 21일 동안 모두 21병의 척수를 확보한 뒤 바이러스가 충분히 약화된 1번 병부터 차례로 사용했다. 1909년 통감부 위생국 시험과에서 치료용 바이러스를 무상으로 공급하기 시작한 것보다 5년이나 앞섰다.

우리나라는 일제보다 먼저 전염병 예방 및 대응 체계를 갖췄다. 당시로서는 최첨단이었다.

대한민국 건국과 정부 수립을 거쳐 급속한 경제 성장과 세계화로 이어지는 동안에도 의료 체계를 지속적으로 성장시켜왔다.

3차 충격 상황에서도 국민과 정부 모두가 투명하고 정직하면서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역사적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