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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팀장시각] 헌법에 남은 박정희 시대의 그늘

우리 헌법은 11조에서 국민이 성별이나 종교, 사회적 신분에 의해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평등권을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평등은 투표권 같은 정치적 기본권뿐만 아니라 경제와 사회, 문화생활 영역도 포함된다. 하지만 이 조항과 모순되는 규정도 존재한다. 헌법 29조는 국가의 잘못으로 손해를 입은 국민에게 배상청구권을 보장하면서도 군인과 경찰을 차별한다. 군인과 경찰은 일반적인 배상청구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별도의 법에서 정한 보상을 받을 뿐이다. 군에서 다치거나, 사망하더라도 턱없이 적은 금액이 주어지는 것은 이 헌법조항을 근거로 하고 있다. 신분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헌법이 군인과 경찰에게는 국가배상 문제에 있어 평등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이 이상한 조항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물려준 폐해다. 사법부 독립을 짓이긴 잔재이기도 하다. 1967년 정부 여당은 국가배상법을 개정한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 피해를 국가가 배상하려니 돈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군인은 공무수행 도중 죽거나 다쳐도 일반 국가배상을 요구하지 못하고, 정부가 정한 소액만을 받아갈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위헌법률심사권을 가지고 있던 대법원은 이 조항이 위헌이라고 선언한다. 엄혹한 시절에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원이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한 사건이었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쓴 저서 ‘사법부’에 따르면 동아일보는 ‘우리 헌정사상 획기적 판결’이라고 극찬했고, 조선일보도 ‘사법부의 독립성을 대외적으로 표방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통해 대법원의 위헌법률심판권을 박탈하고, 국가배상법 위헌 의견을 냈던 손동욱, 김치걸, 사광욱, 양희경, 방순원, 나향윤, 홍남표, 유재방,7 한봉세 등 대법원 판사 9명을 모두 재임용에서 탈락시키는 방식으로 옷을 벗겼다. 그리고 군인은 제대로 된 국가배상을 받을 수 없도록 한 규정이 다시 위헌 판단을 받지 못하도록 아예 이 내용을 헌법에 넣었다. 현행 헌법 29조는 신분에 따른 차별을 인정한 독소조항인 동시에, 정치권력이 사법권을 짓밟은 상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헌법 조문이 민주화의 상징인 1987년 개헌에서 살아남은 것은 아이러니하다. 1987년 개정을 통해 헌법재판소를 만들었고,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위헌법률심판권이 부활했지만 이 조항은 그대로 유지됐다. 개헌 후에 군복무로 인해 다친 이들이나 유족들이 이 헌법조항 자체가 위헌이라는 점을 확인해달라는 헌법소원을 냈지만, 헌법재판소는 “헌법 조항 사이에서는 효력의 우열을 따질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이 조항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개헌 뿐이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관객 수가 400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아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아니었다면 훨씬 많은 관객이 극장을 찾았을 듯하다. 남산의 부장들도, 박정희 대통령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 유물은 헌법에 남아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청와대가 재판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법원의 독립이 강조되고 있다. 10·26 사태도 재조명을 받고 있지만, 반복되는 개헌 논의는 통치구조를 바꾸는 데만 집중한다. 헌법 29조 2항은 개헌을 한다면 가장 먼저 삭제해야 할 조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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