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이 사는 마을에 어느 날 눈이 내렸다. 밤 사이 쌓인 보석 같은 눈을 처음 본 이들은 눈이 밟히지 않을 방법에 대해 회의를 한다. 현자들이 모인 위원회에선 가가호호 방문해 눈을 밟지 말라고 통지하자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를 알릴 것인가, 이를 알리는 사람의 발자국은 또 어떻게 할것인가. 누군가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자 위원회에선 그 알리는 사람을 들어올리면 되지 않느냐는 제안이 나온다. 모두가 옳다쿠나! 맞장구를 친다. 결국 알리는 한 사람을 넷이 들어올리기로 한다. 다음날 눈 밭은 넷의 발자국으로 어지럽혀진다.
동화 ‘바보들이 사는 나라’ 속 한 일화다. 현자들이 모인 위원회, 즉 엘리트 집단층의 어리석음을 풍자한 우화인데, 현대 도시 문제 해결 과정에서 절차적 방법에도 대입이 가능해 여러 가지를 곱씹게 한다.
서울시가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을 두고 다시 공론화 절차를 밟기로 했다. 시기, 내용까지 난상토론식으로 시민의 뜻을 모아보겠다고 했다. 박원순 시장은 지난 19일 브리핑에서 ‘전면 재검토’ ‘백지화’란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현재 설계안의 폐기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원점 재검토란 해석이 많다. 시기적으로도 내년 총선이 지나면 정국이 대선모드에 돌입한다는 점에서 일각에선 사업이 완전히 백지화될 가능성을 예측하기도 했다.
정치 일정이나 정치적 해석과 무관하게 시는 기본적인 숙의부터 묵묵히 다시 진행하겠다는 입장이다. 시민단체들이 지적한 논의의 ‘공개성’ ‘투명성’을 어떻게 보완할 지 적절한 소통방식을 검토해 조만간 내놓을 예정이다.
이렇게 해서 광화문포럼, 광화문시민위원회를 거쳐 몇해 간 벌인 숱한 논의의 작업은 뼈대만 남기고 무위화됐다. 공론화에 드는 사회적비용이 민주주의에 드는 어쩔 수 없는 댓가라고 해도 결과의 성패에 따라 낭비란 비판도 피할 수 없다.
‘소통’과 ‘혁신’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은 박 시장은 이번에도 시민의 힘, 집단지성에 기댔다.
19일 서울시청 브리핑실에서 광화문광장 재조성 사업의 연기를 발표하는 박원순 시장.[서울시 제공] |
그런데 ‘시민 총출동’ 식 논의를 거쳐 나온 해결안이 반드시 문제를 푸는, 꼭 들어맞는 정답인 지에 대해선 늘 의문표가 따라 붙는다.
박 시장이 집단지성으로 푼 행정사례로 꼽는 ‘노들섬’ ‘서울로 7017’의 경우를 보아 더욱 그렇다.
전임 시장 시절에 기획된 ‘한강예술섬 조성사업’을 박 시장은 취임 직후 이 사업을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될 때까지 보류시켜, 이후 노들섬은 임시 텃밭으로 방치됐다. 2013년~2014년에 전문가 의견조사, 노들섬포럼 운영, 시민공개토론회, 시민여론조사, 시민아이디어공모, 시민대토론회 등 다양한 형태의 시민 참여 논의가 전개됐다. 2년에 걸친 공론화 뒤 ‘음악섬’으로 결론내고, 운영계획과 시설구상까지 공모를 거쳐 당선자가 공간을 기획, 조성토록 했다. 조성 과정에서 시장도 열고 앨범도 발매하고, 축제도 여는 등 처음부터 끝까지 시민과 함께 하려고 했다. 그 결과 이 달 개장하는 ‘노들섬’은 무한한 관광 잠재력을 지닌 섬을 100% 활용하지 못한 건 아닌지, 그리고 지속가능한 노들섬을 만든것인지 큰 아쉬움을 남긴다.
‘서울로 7017’도 국제현상공모를 거쳐 외국 전문가의 손에 기획과 설계를 맡겼지만 결과적으론 혹평을 적지 않게 들었다. 전문가나 집단지성에 대한 지나친 낙관, 확신은 자칫 공무원의 소신, 책임있는 행정 행위를 회피하게 만들 수도 있다.
집단지성이 성공하려면 구성원의 다양성 확보가 필수다. 또한 숙의를 거쳐 나온 결과물에 대해선 수긍하는 시민의 성숙도 필요하다. 광화문광장 재조성을 위한 초기 논의과정에선 반드시 수반되어야할 대중교통대책 논의 조차 빠져있었다. 이제라도 총론을 거치고 반대의견을 ‘경청’하겠다는 시의 유연한 태도는 환영한다. 다만 시장과 대통령과의 만남, 유보 요청 이후에 나온 의사결정이란 건 아쉽다. 특히 시장이 무엇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급함 속에서 성과 위주의 사업을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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