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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에서] 위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으로 반도체 소재·부품을 생산하는 일본 기업들이 생산에 타격을 입었다. 반도체 소재·부품 50% 이상을 일본에서 수입하던 국내 기업에도 경영 위기가 닥쳤다. 반도체 웨이퍼를 생산하는 섬코와 신에츠, 반도체 제작 첫 단계인 노광 공정에 필수적인 포토마스크를 제작하는 호야, 불화수소를 만드는 모리타 등의 일본 기업에 크게 의존하던 게 당시 한국의 반도체 기업의 현실이었다.

전문가들은 우리의 현실을 ‘가마우지 경제’라고 개탄했다. 세계적인 반도체 생산국가로 성장했지만 소재와 부품은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 모양새가 자기가 잡은 고기를 삼키지 못하고 어부에 빼앗기는 가마우지와 비슷해서였다. 정치인들은 “국산화율을 높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명박 정부는 소재·부품·장비 기술 경쟁력 확보를 위한 연구개발(R&D) 지원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듬해가 되자 국가별 공급처 다변화 전략과 중장기적인 소재 국산화 R&D 등 떠들썩하게 논의됐던 대책들이 폐기 수순을 밟았다. 주요 반도체 대기업이 단기적으로 물량 확보에 성공하면서다. 기업들은 살만해졌고, 정부는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단기 R&D 사업에 매달렸다. 그해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면서 대기업 중심 정책에 힘이 실렸다. 공급사슬에 있는 중소기업의 동력은 약화됐다. 이후 박근혜 정부는 반도체 R&D 지원 예산을 0원으로 급감했다.

8년 여가 지난 지금. 일본이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의 근간이 되는 핵심소재 수출을 일방적으로 규제한 이후 벌어지는 모습은 ‘2011년 사태’와 판박이다.

대일 의존도가 90% 이상인 품목은 48개나 됐다는 분석이 뒤늦게 쏟아졌고, 가마우지 경제라는 굴욕적인 표현이 다시 등장했다. 내년 총선을 앞둔 정치인들은 ‘해결사’를 자처하며 대책 마련에 여념이 없는 소재·부품 기업과 연구기관을 차례로 방문해 ‘얼굴 도장’을 찍었다. 대기업은 국가별 공급처 다변화 전략을 다시 짰고 정부는 원천소재 자립을 위한 R&D 대책을 재검토했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는 8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반도체 강국 한국의 ‘낮은 부품 국산화율’은 그때나 지금이나 약점이다. 당시의 경험은 오늘날의 자양분이 되지 못했다. 보호무역주의 파고가 높아지면서 세계 교역질서가 무너지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그때보다 풀기 힘든 복잡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약점은 치명적인 허점이 됐다.

안타깝지만, 우리와 싸우고 있는 일본은 좀 다르다. 2010년 9월 중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희토류 수출을 돌연 중단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희토류 생산업체를 출자하고 대체기술 R&D를 꾸준히 지원했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위반이라는 판결을 얻어내는 데도 4년이 걸렸지만, 이와 관계없이 기술개발 정책은 목표에 따라 일관되게 추진됐다. 그 결과 중국에 대한 일본의 희토류 의존도는 2009년 86%에서 2015년 55%로 낮아졌다. 그 사이 일본의 내각 총리는 두 번이나 바뀌었다.

2009년 대규모 리콜 사태를 겪은 일본 도요타의 사례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3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도요타의 재도약 배경으로 기술 혁신을 통해 가격경쟁력을 유지하면서 중소기업과의 동반 성장을 고려한 점을 꼽았다.

일본 대기업은 중소기업과 한 몸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역할이 다를 뿐이지, 함께 명멸한다는 생각이다. ‘떠 받쳐주는(支える)’ 후방기업 없이 대기업의 진짜 경쟁력 강화는 어렵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그래서 도요타는 리콜 사태 이후에도 기존 업체와의 거래를 끊지 않았다. 새로운 공급업체들이 낮은 가격에 부품을 제공한다고 해도 오히려 기존 업체가 납품 가격을 낮출 수 있게 기술자를 파견해 R&D를 도왔다. 특정 부품의 가격 경쟁에서 밀린 중소기업에게는 다른 부품을 생산해서 납품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R&D는 전적으로 대기업이 담당하고 협력사들은 모두 단순 납품업체에 머무는 한국의 ‘기형적인 구조’와는 크게 다르다.

문재인 정부는 이번 소재·부품 경쟁력 강화 대책을 계기로 가마우지 경제를 새끼를 입안에서 키우는 ‘펠리컨 경제’로 바꿔놓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할 수 있는 정부의 전방위적인 투자도 약속했다. 하지만 진정한 극일은 시민들의 불매운동이나 선언적 정책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치욕적이고 고통스런 순간을 마음에 새기면서, “함께 바꿔보자”는 공감과 지속적인 노력이 모든 영역에서 수반되어야 한다.

위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2022년 새 대통령이 취임한 뒤, 우리가 펠리컨 경제가 되어있기를 기대한다.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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