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힘, 잘못이라는 인식 심어 근절하는것이 목표”
관계상 우위가 ‘핵심’…후배가 선배 괴롭혀도 해당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첫날인 16일 MBC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서울 중구 서울고용청에 해당 법안에 근거한 진정서를 제출하고 있다. 해당 법안 관련 첫 진정서 제출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연합] |
[헤럴드경제=신상윤 기자]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개정 근로기준법(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16일 시행에 들어갔다. 그렇다고 ‘직장 내 괴롭힘’이 당장 처벌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 직장 내 괴롭힘 예방, 징계 등을 위한 시스템을 갖추도록 해 직장 내 괴롭힘을 근절하는데 이 법의 목적이 있다고 고용노동부는 설명했다.
▶처벌 규정 없어…“예방·징계 시스템 확립 유도”=이날 노동부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직장 내 괴롭힘을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이 법안은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고 있지만, 직접적인 처벌 규정을 두고 있지는 않다. 다만, 상시 노동자 10인 이상 사업장은 취업규칙에 직장 내 괴롭힘 예방, 징계 등의 내용을 포함하도록 의무화했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처벌보다는 기업별로 직장 내 괴롭힘 근절을 위한 체계를 갖추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해당 취업규칙에는 ▷금지 대상 괴롭힘 행위 ▷예방 교육 ▷사건 처리 절차 ▷피해자 보호 조치 ▷가해자 제재 ▷재발 방지 조치 등이 기재돼야 한다.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에 대한 징계 규정을 신설할 때에는 노동 조건의 불이익 변경에 해당해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사용자는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했다는 신고를 접수하거나 사건을 인지했을 때 지체 없이 사실 확인을 위한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해서는 유급휴가 명령 같은 보호 조치를 해야 한다. 괴롭힘이 사실로 확인되면 가해자에 대해 징계와 근무 장소 변경과 같은 조치를 해야 한다.
사용자가 직장 내 괴롭힘 신고자나 피해자에게 해고를 포함한 불이익을 주면 안 된다. 이를 위반하면 3년 이하 징역이나 3천만원 이하 벌금 부과 대상이다. 직장 내 괴롭힘에 따른 업무상 스트레스가 원인인 질병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개정 산업재해보상보험법도 이날부터 시행된다. 직장 내 괴롭힘에 따른 질병이 산업재해로 인정된다는 얘기다.
직장 내 괴롭힘을 법으로 금지한 나라는 프랑스와 호주 등 소수에 불과하다. 일본도 직장 내 괴롭힘 예방을 위한 행정 지침만 두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를 명문화한 이 법안은 병원 내 신임 간호사에 대한 ‘태움’ 관행 등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잇달아 불거지면서 논란을 일으킨 것이 계기가 됐다. 이 법이 직장 내 괴롭힘은 잘못이라는 인식을 자리잡게 해 해당 행위 근절을 위한 첫걸음이 될 것으로 정부는 기대하고 있다.
▶개념 모호해 혼란 불가피…“일률적 기준 없어”=직장 내 괴롭힘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은 만큼, 어떤 행위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지를 두고 초기에는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려면 직장 내 지위를 포함해 관계상 우위를 이용한 행위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관계상 우위는 나이, 학벌, 성별, 출신, 근속연수, 전문 지식, 노동조합 가입 여부, 정규직 여부 등 다양한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나이의 많고 적음이 직장 내 괴롭힘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선배의 ‘갑질’뿐 아니라 후배의 ‘을질’도 직장 내 괴롭힘에 포함될 수 있다. 예컨대 후배인 인사 업무 담당자가 선배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등 괴롭힌다면 직장 내 괴롭힘이 될 수 있다. 직급이나 근속 연수가 낮거나 짧아도, 학벌 등 인적 속성이나 인사 등 직장 내 업무 영향력을 고려해 관계의 우위에 있다면 후배도 가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 되는 행위가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야 한다. 가령 반복적으로 심부름을 시키는 등 인간관계상 용인할 수 있는 부탁의 수준을 넘어 사적 지시를 하면 직장 내 괴롭힘이 될 수 있다. 이 밖에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상사가 ‘면벽 근무(홀로 벽을 보고 있어야 하는 위치에 배치돼 근무)’를 지시할 경우 노동자가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하기에 적절한 환경이 아닌 것으로 인정되면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할 수 있다.
앞서 노동부는 지난 2월 직장 내 괴롭힘의 개념을 두고 산업 현장에서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보고 구체적인 사례를 담은 매뉴얼을 내놓았다. 매뉴얼을 보면 회사 임원이 육아휴직을 쓰고 복직한 직원에게 기존 업무와는 다른 업무를 맡기고 다른 직원들에게 그를 따돌리라는 지시를 해 피해자가 우울증을 앓게 했다면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 회사에서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은 지시로 정신적 피해를 줬기 때문이다.
회식도 직장 내 괴롭힘의 대표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회식 참석을 강요했을 때 ▷술자리를 만들라고 반복적으로 요구하며 “인사상 불이익을 주겠다”고 경고했을 때 ▷회식 자리에 늦었다고 다량의 술을 강제로 권유할 때 ▷따돌림 수준으로 식사 자리에서 배제할 때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볼 수 있다.
애매한 부분은 업무상 적정 범위에 해당하는지 여부다. 예컨대 부하 직원의 미흡한 업무 처리로 인해 상사가 보완 지시를 반복해서 내렸고, 이로 인해 부하가 스트레스를 받았다면 업무상 적정 범위에 해당할 수 있어 여러 정황을 살펴야 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의류회사 디자인팀장이 신상품 발표 행사를 앞두고 팀원에게 디자인 보고를 시켜놓고는 미흡하다며 계속 보완을 지시해 팀원이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해도 직장 내 괴롭힘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팀장의 지시가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섰다고 보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인사상 불이익도 마찬가지로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승진을 위해 A등급 고과를 필요로 하지만 이를 오랜 기간 받아오지 못한 직원이 문제 제기를 할 때, ‘낮은 고과’가 의도된 괴롭힘이라고 볼 수 있는 다른 사실관계가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 직장 내 괴롭힘의 기준은 일률적으로 제시하기는 어렵고 구체적인 사정을 최대한 참작해 판단해야 한다고 노동부는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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