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으로 전 재산을 잃은 할머니 기사 잘 봤습니다. 아이 돌 때 돌 반지를 받으면서 그 중 하나는 꼭 이웃을 위해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지금이 써야 할 때인 것 같네요. 할머니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헤럴드경제 23일자 11면에 ‘[사건X파일] “폐지 주우며 팔십 평생 모은 3억”…보이스피싱에 당하고 폐암 수술한 할머니 사연’을 보도한 이후 꽤 많은 독자의 이메일을 받았다. 모두 할머니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뜻밖의 선물이었다. 취재하며 기자가 느꼈던 안타까움을 독자와 공유했고,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할머니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보이스피싱을 당한 할머니를 만난 건 지난 22일이었다. 이날 오후 먼저 당시 사건을 담당한 수사관을 만나 사건의 전반적인 내용을 파악했다.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피해자 김순례(가명ㆍ82) 할머니는 지난해 1월 보이스피싱범에게 속아 총 3차례에 걸쳐 전재산 3억 5000만원을 잃었다. 보이스피싱범들은 독거노인이 세상물정에 어둡다는 점을 철저히 이용했다. 할머니에게 “당신의 재산이 금융사기에 연루됐다”고 겁을 줬다. 그러면서 “현금을 뽑아 ‘냉장고’에 넣으면 형사 직원이 가져가 관리해 줄 것”이라고 속였다.
수사관에게 “이게 말이 되느냐”고 거듭 물었다. 그는 “금융기관, 경찰 등은 절대 돈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보이스피싱 대부분은 말이 안 되는 내용”이라면서 “그러나 막상 피해자들이 당황하면 논리적으로 따지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전 재산을 날리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왜 할머니는 그 큰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을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날 오후 늦게 할머니를 직접 만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갔다.
허름한 집 현관문 사이로 두꺼운 패딩을 입은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집이 너무 누추하다”며 안절부절 못했다. 방 안엔 냉기가 돌았다. 바닥에 앉아있는 기자에게 할머니는 “추우니 바닥에 앉지 말라”고 플라스틱 의자를 가져왔다. 그는 “난방비때문에 웬만해선 보일러를 틀지 않고 지낸다”고 멋쩍어했다.
팔십이 넘으신 할머니는 정정했고 침착했다. 60년전 이야기도 술술 풀어냈다. 그는 20대에 자궁암 진단을 받고 “3개월밖에 못산다”는 의사의 말에 결혼도 포기하고 일생을 홀로 살아왔다고 했다. ‘죽으면 천국에 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남는 시간은 모두 교회에서 보냈다고 했다. 기적처럼 건강을 지켜냈지만 외로운 삶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에게 친구는 사치였다. 부모와 형제까지 세상을 떠난 뒤 철저히 혼자였다. 물론 ‘보이스피싱을 조심하라’고 알려주는 이 하나 없었다.
보이스피싱범에게 속아 넘긴 돈은 할머니의 전재산이었다. 그는 팔십 평생 고아원 보모, 식당 설거지, 건물 청소, 가정부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나이가 들어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20년 전부터는 폐지를 줍는 일을 했다. 할머니는 “교회에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할 돈이었는데 모두 물거품이 돼 속상하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저녁이라도 함께 하자는 제안을 할머니는 부담스러웠는지 한사코 거부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근처에 있는 순대국집에서 모듬순대 한 접시를 들고 다시 찾아갔다. 그는 “이런 거 안 먹는다”면서도 사람의 관심이 내심 반가운 듯했다. 할머니는 기자의 손에 귤 몇 개를 쥐어 쥐며 “다음에 또 놀러 오라”고 말했다.
할머니가 세상과 고립돼 살았고, 무엇보다 외로웠기 때문에 그 큰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독자들도 공감했을 듯하다. 이메일 중에는 작은 난로라도 사주고 싶다는 이도 있었고, 쌀이나 생필품을 보내주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 동사무소에 알리니 선뜻 물품을 동사무소에 보내면 직접 전달해주겠다고 했다. 현금 기부를 할 수 있는 방법도 살펴보겠다고 했다. 냉기만 도는 할머니 집 방바닥에도 조만간 온기가 돌 듯 하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졌다고 해도 누군가를 도우려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은 듯 싶다. 다만 기부 방법을 모르거나 기부단체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 이를 외면했을 수도 있다. 지자체와 기부단체 등에서 뿔뿔이 흩어져있는 따뜻한 마음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왜 기부를 하지 않는지 이유를 살피고 기부 절차를 간소화하고 기부단체의 투명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보도 이후 쏟아진 이메일, 우리 사회에는 ‘기회가 없어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선한 마음이 읽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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