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정보 반출' 의혹 유해용 법원 “기록복사본…원본 대법에” 보통 4~5줄 통보와 대조적 ‘제식구 감싸기’ 비판 의식한 듯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과 재판거래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의 첫 구속 시도가 무산됐다. ‘제식구 감싸기’라는 비판 여론을 받고 있는 법원은 재판 기록을 반출한 혐의의 유해용(52) 변호사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3000자가 넘는 장문의 해명을 이례적으로 남겼다.
서울중앙지법 허경호 부장판사는 20일 공무상 비밀누설과 직권남용, 절도, 개인정보보호법위반 혐의 등으로 청구된 유 변호사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허 부장판사는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을 지낸 유 변호사가 퇴임하면서 가져간 재판 기록이 법에서 반출을 금지한 ‘공무상 비밀’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허 부장판사는 “문건에는 사건의 진행 경과나 상고 사건의 통상적인 처리절차 등의 일반적 사항 외에 구체적 검토보고 내용과 같이 비밀 유지가 필요한 사항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공무원의 비밀준수의무 위반을 이유로 한 징계처분의 대상이 됨은 별론으로 하고, 공무상비밀누설죄의 비밀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또 유 변호사가 들고 나온 기록물은 사본이고, 원본이 그대로 대법원에 남아 있는 이상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 혐의도 인정되기 어렵다고 봤다. 허 부장판사는 “공공기록물관리법에서 말하는 공공기록물은 국가적으로 보존가치가 있다고 인정된 기록물의 ‘원본’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허 부장판사는 3600자 분량의 영장 기각 사유를 4개 문단으로 나눠 상세히 설명했다. 통상 영장 기각 사유는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식으로 4~5줄 간략히 변호인에게 통보된다. 기소 전 단계에서 혐의 성립 여부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경우 재판 시작 전에 결론이 난 것처럼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법원이 이례적으로 상세한 설명을 내고 검찰이 구성한 혐의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영장 기각 사유가 아니라 판결문에 가까운 판단이 나온 셈이다. 전례없는 대법원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면서 법원이 ‘제식구 감싸기’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의식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검찰은 강하게 반발했다.
영장 기각 직후 검찰은 “영장판사의 장문의 기각사유는 어떻게든 구속사유를 부정하기 위해 만든 ‘기각을 위한 기각사유’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동안 법원은 재판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압수수색 영장을 번번히 기각했다. 그 때마다 법원은 기록은 ‘재판의 본질’이므로 함부로 내줄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검찰은 법원 스스로 기록을 ‘재판의 본질’이라고 해놓고 반출한 혐의를 문제삼을 때는 구속영장을 기각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검찰 관계자는 “유 변호사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담한 방식으로 공개적으로 증거인멸을 하고, 일말의 반성조차 없었던 그간의 경과를 전 국민이 지켜본 바 있다”면서 “이런 피의자에 대해 ‘증거인멸의 염려가 없다’고 명시하면서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은, 사법농단 사건에 있어서는 이런 공개적, 고의적 증거인멸 행위를 해도 구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주는 것으로서 대단히 부당하다”고 성토했다.
유 변호사는 대법원 재판연구관실에서 근무하던 2014~2016년 상고심 계류 중인 사건 보고서와 판결문 초고 등을 올해 초 퇴직하면서 반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검찰은 유 변호사가 대법원 근무 때 관여한 숙명여대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사이 소송을 변호사 개업 후 수임한 사실을 확인하고 변호사법 위반 여부에 대해서도 수사 중이다.
좌영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