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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APAS]노란장판 감성 그만 좀 팝시다!…사과는 커녕 피해자 코스프레
[헤럴드경제 TAPAS=이유정 기자] ‘노란장판 감성’이란 말이 있다. 한국 특유의 신파, 궁상, 억울함, 자기연민 등이 녹아있는 작품의 분위기를 낡고 눅눅한 노란장판에 빗댄 것이다.

남자 주인공은 항상 조폭과 얽혀 피가 떡이 되고 여주인공의 이름을 외치다 죽는 90년대 뮤직비디오, 천재적이지만 가난한 남성 화자(주로 비극적 지식인)가 ‘사랑과 안정을 찾아’ 집창촌을 헤매거나 제 성질에 못 이겨 아내를 폭행하는 전개 등은 노란장판 감성의 대표적 사례다. 보통 결론은 ‘불쌍한 나’로 모아지며 오래된 관습과 특유의 성관념을 답습한다.

성추행 파문을 일으킨 연극연출가 이윤택의 기자회견이 열린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한 여성이 ‘사죄는 당사자에게 자수는 경찰에게’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각계 유명 인사들에 대한 성폭력 폭로가 이어지는 요즘,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해명 내지 사과에도 노란장판 감성이 엿보인다. 그들은 언제나 억울하며, 변명은 구질구질하다.

# 피해자가 뉘신지?

“교수한답시고 그나마 스케줄도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런 과정을 다 겪으면서 7년을 근무했는데, 남는 게 이거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

배우 조민기가 방송 인터뷰에서 밝힌 해명 일부다. 그는 청주대학교 연극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수년간 제자들을 성추행한 의혹을 받고 있다. 조 씨는 “교수라는 명예보다 내 모교고, 내 후배들이고, 그래서 와 있는 건데, 그런 학교에서 그런 음해가 계속되면 난 있을 이유가 없다”고도 했다.

의혹이 제기된 사건에 대한 기억의 노력, 최소한의 성찰은 찾을 수 없다. 반면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7년간 교수를 했지만 성추문 음해에 휩싸인 나(조민기)’를 향한 자기연민과 억울함이 돋보인다. 피해자가 누구인지 잠시 헷갈리는 대목이다. 여성을 추행 또는 폭행한 화자의 절절한 고충 토로 서사. 전형적인 노란장판 감성 코드다.


# 욕망과 관습

앞서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이 재조명되며 문단 내 성폭력이 도마에 올랐을 때다. 한국 작가회의 사무총장을 맡았던 이승철 시인은 최 씨에 대해 ‘피해자 코스프레를 남발한다’며 준엄히 꾸짖었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남자의 성적 욕망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가. 그리고 그 욕망의 피해자가 받는 고통은 또 얼마나 지속적이고 치유 불가능한가.”

성추행 파문을 일으킨 연극연출가 이윤택이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연극계 성폭행 파문을 일으킨 연극연출가 이윤택의 유체이탈 화법은 어땠나. “극단 내에서 18년 가까이 진행된 생활에서 관습적으로 일어난 아주 나쁜 행태라고 생각한다. 제가 어떨 때에는 이게 나쁜 죄인지 모르고 저질렀을 수도 있고 죄의식을 가지면서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 그랬을 수도 있다.”

욕망과 관습을 거론하는 이같은 발언들은 가해자의 나약함과 수동성을 은연중 강조한다. 노란장판 감성의 또 다른 특징이다. 연희단거리패 배우 오동식의 폭로에 따르면, 연출가 이 씨는 기자회견 예상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불쌍해보이는’ 표정을 연습했다고 한다.

부산 동구 초량동 이바구길에 있는 이윤택 연출가 기념 동판이 철거되고 있다. 동판은 초량초등학교 출신인 이 연출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3년 부산 동구 초량동 이바구길에 설치됐었다. [사진=연합뉴스]

# 그는 절대권력이었다

조민기, 이윤택 등이 노란장판 감성과 어긋나는 지점은 따로 있다. 이들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가졌다는 것. 가난에 허덕이거나 을의 위치에서 분노하는 보통의 노란장판 감성 주인공이라면 넘볼 수 없는 위치다. 그들이 가진 권력은 지망생 신분의 피해자들을 입막음하고, 그 긴 세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만큼 막강했다.

결국 현장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 21일 배우와 연출, 평론가 등 연극인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이 그 예다. 이들은 “권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문화와 구조 속에서 성폭력은 은밀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이뤄졌고, 심지어 ‘관행’이라는 기만적 표현으로 학습되고 묵인됐다”며 “이러한 폐단의 고리를 끊어내고자 모이고 연대하겠다”라고 선언했다.

경찰은 지난 22일 배우 조 씨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연출가 이 씨의 성폭력 피해자들은 법적 대응에 나설 예정이다.


/kul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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