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단독][미투 전방위 확산]“성추행 교수는 여전히 강의중”…대학가 ‘외로운 미투’
-대학 소모임, 성희롱 교수 대자보 등 적극 활동
-학교 측 안일한 대응…학생들 무관심엔 좌절도
-“성폭력 만연한데 문제 제기조차 힘들다” 호소

[헤럴드경제=정세희 기자] ‘올해 초 과 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의 익명제보가 페이스북에 올라왔습니다. 진상 규명을 하고 가해자는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할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회에서는 공식적인 의견 표명조차 없었습니다.”

지난 2016년 12월 경희대학교에 대자보가 올라왔다. 교수 성추행 의혹의 진실을 밝히고 처벌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한 교수가 회식자리에서 여학생의 가슴을 움켜쥐는 성추행을 했다는 제보가 페이스북 대나무 숲에 올라온 건 같은 해 2월. 그러나 10개월이 지나도록 학교는 침묵했다. 이어서 다른 교수가 강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한 과에서 2명의 교수가 성범죄 의혹에 휩싸였지만 학교나 교수 모두 아무런 해명조차 없었다. 계속된 침묵에 학생들이 힘을 합쳐 소모임을 만들어 문제제기에 나섰다. 그렇게 경희대학교 소모임 ‘흰’이 만들어졌다. 이름은 한강 작가의 소설 ‘흰’에서 따왔다. 여성혐오와 성차별 등으로 병들어 가는 대학에 치유의 목소리를 내겠다는 다짐이었다. 

지난 2016년 2월 경희대학교 페미니즘 소모임 ‘흰’이 학교에 붙인 대자보. [사진제공=흰]

흰에서 활동하고 있는 최모(23ㆍ여) 씨는 지난 22일 서울 동대문구의 한 카페에서 기자와 만나 “아무도 문제제기를 안 했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이상했고 의아했다. 누군가는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 후 교내 성추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계속됐다. 학교 측에 공개 간담회를 열고 교수의 공식 답변을 요청했다. 교내 성추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학교 측에 제출하기도 했다.

달라지는 것은 많지 않았다. 현재까지 해당 교수는 여전히 수업을 하고 있다. 흰에서 활동하고 있는 윤모(24ㆍ여) 씨는 “대자보를 붙일 때만 해도 쉽게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 이 싸움이 이렇게 지속될 줄 몰랐다. 너무나 거대한 무언가와 싸우고 있다”고 토로했다.

가장 먼저 성희롱 문제에 소극적인 학교와 싸워야했다.

이들은 학생들의 질의를 받고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공개간담회를 요구했지만 결국 열리지 않았다.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됐던 교수는 바로 다음 학기에 강단에 섰다. 다른 교수 수업은 아무런 설명 없이 다른 강사로 대체됐다. 이들은 다시 학교측에 “진실을 규명하고 제대로 된 해명을 하라”고 요구했다. 4개월이 지난 3월 말에야 해당 교수의 공식답변서를 받을 수 있었다. 모두 해당 의혹을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최 씨는 “교수가 쓴 답변서를 학생이 대독하는 형식이었고, 한 교수는 자신이 재판을 받고 있는 내용을 외부에 발설하면 명예훼손으로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내용까지 담겼다. 이는 결코 사과문으로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학교 측이 내놓은 공개입장에서는 학교의 안일한 대응이 여실히 드러났다. 학교는 2016년 2월 29일 성희롱 폭로 글이 게시된 직후 학교 옴부즈맨에 진상 조사를 요청하지 않았다. 학과 원로와 문과대 학장이 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입장문에 따르면 ‘학과 원로와 문과대 학장의 조언에 따라’ 학교 옴부즈맨에 진상조사를 요청하는 것을 미뤘다. 그리고 7개월이 지나서야 다시 진상조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당 교수는 여전히 수업 중이다. 학교 측은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교내 성추행 교수의 경우 피해학생이 진상조사를 거부해 해당 교수의 징계가 불가능했고, 다른 교수는 학교 밖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처벌이 불가능한 데다 당시 그가 재판 중이었기 때문에 유죄 판결이 나오기 전까진 징계를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들은 해당 교수를 징계하는 게 불가능하더라도, 학교는 학교 성범죄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최 씨는 “교내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되지 않도록 재발방지대책이나 교수 징계 건에 대해 제도적 정비를 하는 등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회원들이 흰 장미를 달고 검찰 내 성폭력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흰 장미는 성폭력 피해 고발 캠페인인 ‘미투’를 상징한다. [연합뉴스]

이들이 가장 절망감을 느끼는 순간은 주변 학생들의 무관심을 느낄 때다. 모두가 분개하고 함께 문제제기를 할 줄 알았지만, 당시 문제에 관심 있는 친구들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교수를 편드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은 문제제기 때마다 ‘명예훼손에 걸릴 수 있다’는 주위의 염려에 형사소송법까지 공부했다. 문제제기를 하려면 법적인 분쟁까지 감안해야 한다는 게 서글펐지만 나름 방어책을 마련해야 했다. 전문가에 자문을 구하고 직접 법 서적을 사서 명예훼손 구성 요건 등을 알아봤다. 최 씨는 “학생으로서 교수 성범죄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는 게 왜 명예훼손에 걸리는지 모르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정말 법정에 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돈을 모을 생각까지 했다”고 토로했다.

이들은 최근 성평등을 위한 교내 워크샵을 여는 등 인식개선에 힘쓰고 있다. 작년 8월 문학계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백을 담은 책 ‘참고문헌없음’ 낭독회를 가졌고 교내 만연한 혐오 발언 아카이빙을 만들어 이를 기록하는 활동도 펼쳤다. 외부 강연, 좌담회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석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윤 씨는 “소모임 구성원들도 너무 지친 나머지 하나 둘 그만뒀다. 이제는 그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며 “하지만 여전히 학생들이 교내 성희롱 성추행에 노출돼 있고 침묵을 강요 받고 지낸다.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문제를 끄집어 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say@heraldcorp.com


※추후보도
강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교수는 검찰에서 혐의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