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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플 산더미 현금 놔두고 왜 돈을 빌리지?
美 기업 부채·이자비용엔 세금공제 혜택
합법적 시스템 이용 앉아서 수익 창출
‘만드는 자’가 ‘거저먹는 자들’에 예속
병든 금융이 경제성장 방해 신랄한 비판


#미국 대형유통업체 타깃의 자회사였던 머빈스는 257개의 매장을 보유한 소매업체로 수익이 꽤 좋았다. 그런데 2004년 서버러스 캐피털 매니지먼트 등 금융업체 몇 곳이 연합한 사모펀드 컨소시엄이 머빈스를 인수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이들은 머빈스에서 부동산 자산을 분리한 뒤 이를 담보로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서 8억 달러를 차입했다. 이 대출금이 바로 타깃 측에 지불할 인수 대금이었다. 머빈스는 원래 소유하고 있던 매장을 임차해서 쓰는 신세가 됐다. 그에 따라 불필요한 비용이 추가됐고, 사모펀드 측은 비용절감을 이유로 종업원들을 해고했다. 서비스 질이 떨어지고 매출이 준 머빈스는 불어나는 손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2008년 파산했다. 파산시점에도 사모펀드는 여전히 부동산을 통해 계속 수익을 거둬들였다.

“GDP에서 금융이 차지하는 비중이 오늘날만큼 높았던 시기는 대공황 직전밖에 없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2008년 금융 위기가 발생하기 전 10년간처럼 ‘광란의 20년대’에도 금융발 호황과 경이적인 기술 발전뿐 아니라 엄청난 소득 불평등이 두드러졌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정체되어 있는 동안 상위 계층의 소득은 증가했다. 대체로 주가 호황에 따른 결과였다. 공공 및 민간 부문 양쪽 모두에 걸쳐 부채가 증가했다는 점도 흡사하다.”(‘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에서)

금융시스템이 실물경제에 이바지한다는 본연의 역할은 뒷전이고 돈놀이로 배를 불린 전형적 예다. 글로벌 경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라나 포루하는 최근 저서 ‘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부키)에서 금융시스템의 부패를 낱낱이 고발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 시장 시스템에 존재하는 자금가운데 실물경제에 투입되는 자금은 15퍼센트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폐쇄적인 금융업계 내부를 오가면서 투자가 아닌 투기에 이용되고 있다. 금융부문은 미국 전체 기업 수익가운데 무려 25퍼센트를 가져가지만 일자리는 전체의 단 4퍼센트만 창출한다.

기업들도 여기에 가세하고 있다.

2013년 봄, 애플의 CEO 팀 쿡은 170억 달러를 차입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세계 최고의 기업 가치를 자랑하던 애플은 이미 은행에 무려 1450억 달러가 넘는 현금을 쌓아두고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돈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이는 은행계좌에서 돈을 꺼내 오는 것보다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이다. 애플 같은 블루칩 기업은 대출에 따르는 이자나 수수료 등의 비용이 다른 기업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게다가 애플의 은행 계좌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어 이 돈을 미국으로 들어오려면 미국 세법에 따라 상당한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제너럴 일렉트릭(GE)은 한때 금융부문 자회사인 GE캐피털을 통해 소비자 신용과 대출, 인수합병, 서브프라임 모기지 거래 등 각종 금융 수완을 발휘해 수익을 키워나갔다. 저자에 따르면 화이자, 마이크로소프트 등 수많은 대기업들은 금융 거래, 헤지, 조세 회피, 금융 서비스 판매 등 돈을 이리 저리 굴리는 방법만으로도 엄청난 돈을 벌고 있다. 어떤 항공사는 비행기 티켓을 판매하는 것보다 유가 등락 위험을 헤지해 버는 돈이 더 많다.

미국의 기업은 이제 더 이상 기업이 아니라 금융으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기업들의 이런 무차별적인 금융활동은 상당수 합법적이라는 데 저자의 문제의 인식이 있다. 오늘날의 법과 제도가 이를 조장 내지 묵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기업의 부채에 따르는 이자 비용에는 세금공제가 적용되지만 배당금과 유보 이익금에는 혜택이 없다. 추산에 따르면, 이런 세제 혜택에 힙입어 기업의 부채비용은 자기 자본 비용에 비해 42퍼센트 가량 더 저렴하다. 그러니애플이 산더미 같은 현금을 들여와 세금을 납부하기보다 돈을 빌려 투자자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다.

기업들은 또 ‘더블 아이리시’기법 등을 통해 세법의 그물망을 빠져나간다.


저자는 경제시스템이 병들어 있기 때문에 이런 행태가 만연해 있다고 지적한다. 그 질병의 이름은 바로 ‘금융화(financialization)’다. 금융과 금융적 사고방식이 기업과 경제의 모든 측면을 구석구석 지배하게 돼 버린 현상이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금융이 경제성장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금융화가 만드는 자(maker)’들이 ‘거저먹는 자(taker)’들에게 예속되는 잘못된 경제를 만들어낸다고 본다. ‘만드는 자’는 실질적인 경제성장을 창출하는 사람과 기업, 아이디어를 일컫는다. ‘거저먹는 자’는 고장 난 시장 시스템을 이용해 자기 배만 불리는 이들, 즉 금융업자와 금융기관, 일부 CEO, 정치인, 규제 담당자들이다.

저자는 기업들에 얽힌 흥미로운 사례와 월가와 워싱턴의 밀월관계에서부터 세법, 정책 실책 등을 소개하며 해결책은 바로 금융과 실물 경제, 즉 ‘거저먹는 자’와 ‘만드는 자’ 사이의 힘의 균형을 되찾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를 위한 정책적 제안도 제시했다. 안전한 금융 시스템을 위한 규제방안,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마땅한 몫의 세금을 내도록 만드는 세제 개혁, 일자리 증가를 이뤄 낼 공공과 민간 부문의 협력 증진, 기업 문화 변화 등이다. 미국만의 얘기는 아니라는데 책의 공감이 크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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