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말하는 지방선거·공영방송 그리고 보수의 길
보수의 위기다. 보수 진영 내부에서는 보수가 궤멸했다는 자조 섞인 얘기도 흘러나온다. 최순실 국정농단과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와해된 보수가 쇄신과 혁신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진영을 재정비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당장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미 보수 야당 간 대통합론이 불거지고 범야권에서는 정책연대, 선거연대론이 무성하다. 향후 정국이 어떻게 흘러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정치권에서 여야 간에 쟁점을 조율하고 원활한 국회 운영이라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이 심재철 국회부의장이다. 심 부의장을 국회 부의장실에서 만나 향후 보수의 길에 대해 들었다.
심재철 국회부의장은 1993년 교통사고를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우여곡절 끝에 정치에 입문해 제2의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지체장애 3급인 그는 장애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정치인이 되는 것이 작은 바람이라고 했다. 박해묵 기자/mook@ |
▶철저한 보수 반성에서 출발해야=심 부의장은 보수의 위기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반성하는 모습이라고 했다. 그는 “정치는 책임인데 국정농단이 터지고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지금이라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나와야 하냐는 질문에 “반성하는 모습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당 혁신위원회가 인적 혁신을 위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박계 의원 두 명의 자진탈당을 권유한 상황이다. 심 부의장은 “인적 혁신이 있어야 국민이 바뀌는가보다 생각한다. 시간이 지났다고, 갈등이 줄어들었다고해서 그냥 지나가면 이전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내년 지방선거에 대한 걱정도 크다. 차근차근 선거 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지방선거도 위태로울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 심 부의장은 “지금으로서는 걱정이 크다. 보수가 분열된 채로 선거를 치르면 당연히 참패할 것”이라며 “통합을 하든지 연대를 통한 단일화를 하든지 최소한 분열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야 내년 선거에서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그 방안으로써 당대당 통합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면서도 바른정당과의 연대에는 긍정적인 입장이다. 심 부의장은 “바른정당에서 온다는 분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면서 “보수가 분열하지 않고 큰 틀에서 서로 통합하는 게 필요하다. 복당의 명분을 찾겠지만 상처를 헤집는 것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조심스런 입장을 밝혔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여야가 일대일 구도로 가는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국민의당까지 같이 가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최근 한국당이 장외투쟁에 나서면서 그 이유로 들었던 ‘공영방송 장악 시도’에 대해서도 물었다. 전 MBC 기자였던 심 부의장은 “언론의 핵심은 중립성이다. MBC 노조를 만들 때 권력으로부터 방송을 지키기 위해서 노조라는 수단을 갖고 했다. 그런데 뒤에 보니까 노조활동을 하다 사장을 지낸 뒤 정치판으로 들어오더라. 이건 언론 본연의 모습이 아니다”고 했다.
그는 “최근 들어 방송사를 보면 임기가 보장된 사장들을 전 정권 사람이라고 무조건 나가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노조 만들 때 땡전뉴스, 보도지침이라는 게 공식적으로 존재했다. 이 때문에 방송 독립, 공정 방송이 국민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인데, 지금 파업 이유가 뭔가. 사장 보기 싫다, 나가라는 것이다. 이슈가 국민들에게 소구력이 없다. 방송이 파업을 무기로 해서 싸울 때는 소구력이 있어야 국민들도 그러려니 이해를 해 주는 것이지 이권싸움으로 이전투구로 변질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당에서 국정조사를 요구하자 더불어민주당이 이전 정부에서의 ‘방송장악 시도’까지 조사하자고 역제안한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광우병만 보더라도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했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다”며 “그러고나서 아무 얘기도 안 한다. 최소한 사과는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좌편향된 사고에 의해서 방송을 몰아가는 것은 언론 독립을 위해서 좋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터뷰 시작부터 정치 현안들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지만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면 보수 정당에서 5선까지 한 그의 경력에 의문이 들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냈고, MBC 기자로 노조 창설을 주도했던 전력은 오히려 현 여당과 이념적으로 맞지 않느냐는 의문이다.
심 부의장은 “대학교를 다닐 때나 87년 민주화운동 당시에는 좌우 진영의 큰 차이가 없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독재와 민주의 싸움이 화두였지 진보와 보수의 이념 대결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심 부의장은 “진보,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정당이 나온 게 16대 국회 때부터다. DJ만 하더라도 당시에 좌파라고 생각했나, 진보정당이라고 생각했나. ‘DJ-노무현’으로 묶이면서 진보정권이 나오고, MB를 우파로 구분했던 것”이라고 했다.
정치계 입문을 앞둔 심 부의장에게는 당의 정체성에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YS가 대통령이 되면서 전직 두 대통령을 구속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민주자유당행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국민 실생활과 밀접한 입법 활동에 주력=심 부의장은 국회부의장이기에 앞서 16대부터 내리 5선의 중진 의원이다.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입법활동을 꼽아달라고 했다.
그가 꼽은 법안은 공중화장실법이다. 의외로 국민 생활의 세심한 부분과 관련된 법안이었다. 심 부의장은 “모든 화장실을 만들 때 면적을 반으로 잘라서 절반은 남성, 절반은 여성으로 공사한다. 남자 화장실은 소변기 2개, 대변기 2개인 반면 여자 화장실은 대변기 2개뿐이다”고 설명했다. 아무런 규제 조항도 없었던 만큼 관련법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남녀 동수의 변기를 설치하도록 하는 입법발의를 했다.
심 부의장은 “지금은 고속도로 여자화장실에서 줄 서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미국처럼 법에 사람 이름을 붙였으면 ‘재철법’이라고 했을 것”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손톱 손질을 하더라도 미용사 자격증이 있어야 가능했다. 요즘처럼 네일아트숍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심 부의장의 입법활동의 결과물이다. 미용사 자격증이 없이도 네일아트를 할 수 있도록 공중위생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심 부의장은 “3~4년 전부터는 미용사 자격증이 없어도 네일숍을 열 수 있다”며 “일자리를 늘리고 창업을 유도할 수 있도록 했다. 쓸데 없는 ‘손톱밑 가시’를 없앴다”고 했다.
경기 안양 동안을이 지역구인 그는 2000년부터 17년 동안 교육청 예산을 확보해 지역 내 학교 강당을 13개 짓도록 했다.
요즘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국회 본회의장에서의 표결실명제를 도입하는데도 16대 초선의원 당시 적극 참여했다. 일 안 하는 국회의원들에게도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적용하도록 해 이를 부분 도입하도록 했다.
심 부의장이 밝힌 국회의원으로서 목표는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다”는 것이다. 다분히 교과서적인 대답이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의미를 곱씹게 했다. 심 부의장은 “지체장애인 3급인데, 지역구 의원을 한다는 점에서 장애인계에서는 나를 높게 봐준다”며 “장애인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싶다. 비장애인에게도 올바른 모습을 보이면서 희망을 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교통사고로 맞은 인간 심재철의 위기=심 부의장이 지팡이를 짚고 다닌 것은 20년이 넘었다. 1993년 6월 30일, 그는 이날을 잊을 수 없다. 30대 중반의 기자로 종횡무진 활동을 하던 때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10개월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가까스로 퇴원을 해 집에 혼자 남아 아파트에서 내려다 보이는 다른 사람들이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며 괴로워했다. 심 부의장은 “자살이란 걸 생각했다. 그만큼 사고가 준 충격이 컸다”고 했다. 전도유망한 30대 남성에게 교통사고로 겪었을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터다.
온갖 상념이 정신을 갉아먹을 정도로 괴로운 시기였다.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이렇게 침잠하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이걸 어떻게 이겨내지 고민하다 정신을 다른데로 돌리자, 계속 죽느냐 사느냐는 문제를 붙들고 있어서 해답이 안 나온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국회의원 공약집 정리다. 심 부의장은 “사고 나기 전 기자때부터 생각했던 거다. 의원들이 공약을 잘 지키는지 정리하자는 건데, 그때가 PC통신이 막 알려지던 때”라고 회상했다.
휠체어를 타고 목발을 짚고 당시 종로5가에 있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찾았다. 5층 건물에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목발을 짚고 계단을 오르면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이 전신을 흘려내렸다.
심 부의장은 “여기에 몰두하면서 다시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공약집을 복사하고 문서 내용을 직접 입력해 통신에 띄우고 나중에는 책을 한권 냈다. 하지만 한권도 안 팔렸다”고 했다. 그는 “아무도 공약에 신경을 안 쓰던 때였지만 이후 17, 18대 국회 즈음에는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공약을 따져보기 시작했다”며 자신이 매니페스토 운동의 시초라고 웃어보였다.
심 부의장은 “운좋게 살아나서 지금은 제 2의 삶을 살고 있다. 덤으로 사는 삶이라고 생각하니까 아집이 덜어지더라”고 했다. “매사에 ‘감사하다’는 단어가 가깝게 다가온다”고도 했다.
죽을 고비를 넘긴 그에게 인생의 시금석이 될 만한 책 한권을 소개해달라고 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꼽았다. 나치 치하에서 오스트리아 국적의 유대인이었던 빅터 프랭클의 글에서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 존재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극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버텨내는 모습을 통해 좌절하고 힘든 사람에게 힘이 될 것”이라고 추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가족에 대한 고마움도 표했다. 결혼 이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15대 총선에서 낙선했을 때도 항상 곁을 지켜준 아내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첫돌을 맞은 딸에게는 미안함이 크다. 이후에도 다리가 불편해 같이 놀아주지 못한 것이 제일 아쉽다고 했다.
이태형 기자/th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