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전후 뇌손상·수술 후유증 등이 원인
조기 꾸준한 관리·치료 땐 정상생활 가능
‘정신병’ 등 불편한 주변시선이 더 큰 문제
지난해 7월 부산 해운대구 해운대문화회관 사거리에서 7중 추돌 사고를 일으켜 무려 사상자 26명(사망 3명 포함)을 발생시킨 가해 차량의 운전자 김모(54) 씨. 뇌전증 진단을 받고 평소 치료제를 복용해 왔다는 김 씨는 “당일 약을 먹지 않아 발작을 일으켜 사고 당시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하지만 경찰은 “운전자가 사고 당시 의식이 있었다”며 김 씨가 뺑소니 사고를 낸 것으로 결론내렸다. 이 사건은 뇌전증이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지난 13일은 ‘세계 뇌전증의 날’이었다. 이를 기념, 대한뇌전증학회는 17일까지 5일간을 ‘뇌전증 주간’으로 선포했다. 이처럼 의학계에서 뇌전증을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이유는 뇌전증은 누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간질로도 불리는 뇌전증(Epilepsy)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악령에 의해 영혼이 사로잡힌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특유의 경련과 흥분 상태 탓에 사회적 편견도 여전하다. 하지만 정확하게 진단받고 치료하면 치유는 물론 정상 생활도 가능하므로 꾸준히 관리해야 한다고 전문의들은 충고한다.
▶뇌ㆍ중추신경계 질환 등과 연관=원인을 살펴보면 뇌전증은 경련을 일으키는 단순한 ‘미치광이병’이 아니다. 임희진 고려대 안암병원 신경과 교수는 “대뇌에는 신경세포들이 서로 연결돼 미세한 전기적인 신호로 정보를 주고받는다”며 “비정상적인 흥분이나 동시적 신경 활동에 의해 전기신호가 잘못 방출될 때 경련 혹은 발작이 일어난다. 이러한 발작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뇌전증”이라고 설명했다.
뇌전증이 왜,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히 모르는 실정이다. 다만 의학계에서는 다음 질환이나 원인이 일반적으로 뇌전증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어나기 전 또는 분만 중 또는 분만 직후 여러 이유로 일어나는 뇌 손상 ▷뇌의 선천적 또는 유전적 이상ㆍ발달 이상 ▷뇌 외상 또는 뇌 수술로 인한 후유증 ▷ 뇌수막염, 뇌염 등 중추신경계 감염성 질환 ▷중추신경계를 손상시키는 독성물질 또는 대사이상 또는 영양결핍 ▷뇌경색, 뇌출혈 등 뇌혈관계 이상 ▷악성 혹은 양성 뇌종양 ▷일부 유전적 성향이 있는 양성 소아ㆍ청소년기 뇌전증(idiopathic epilepsy) ▷여러 검사에서 원인을 못 밝히는 경우(cryptogenic epilepsy) 등이다. 주로 뇌과 중추신경계에서 원인이 추정되고 있다.
▶자각 증상 없이 지나가는 경우도=뇌전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증상은 바로 전신 경련이다. 임 교수는 “뇌전증 발작이 일어날 경우 의식이 없어지거나 온몸이 뻣뻣해지고 떠는 양상 또는 비정상적인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고 뇌 기능의 일시적 마비 증상 때문에 구토, 청색증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뇌전증은 온몸을 떨면서 의식을 잃는 증상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임 교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소위 ‘멍’ 하면서 증상이 지나가기도 하며, 인지반응이 늦어지고 한 쪽 팔만 흔드는 등 다른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뇌전증이 심각하다. 증상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어린이 100명 중 3명은 뇌전증을 앓고 성인이 되기도 한다. 임 교수는 “뇌전증은 더 이상 숨겨야 할 병이 아니다”며 “특히 초기에 정확히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으면 정상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에 뇌전증이 의심될 경우 즉시 병원을 찾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뇌전증 환자 10명 중 7~8명은 약으로 증세가 호전되기 때문에 의사와 충분히 상담한 후 최소 2~5년은 꾸준히 약을 복용해야 한다. 의사와 상의 없이 약을 줄이거나 중단해서는 안 되고 여행을 가거나 출장을 가게 될 경우에는 약을 넉넉히 챙겨야 한다. 또 약을 잘 복용한다고 해도 과도한 음주와 수면 부족은 발작 증세를 유발 할 수 있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
임 교수는 “뇌전증은 고령화 사회로 갈수록 점점 더 발생률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에 고령화 속도가 빨라지는 우리나라에서도 신경써야 하는 증상”이라며 “다수의 환자에서 적절한 관리와 치료가 가능한 질환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편견 때문에 방치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말했다.
▶국내 환자 30~50만 추정= 뇌전증(간질)을 앓고 있는 환자는 현재 14만명 가량으로 통계상 잡히고있다. 우리나라 인구(5170만4332명ㆍ올해 1월 기준)의 약 2.7%에 이르는 수치다. 하지만 이는 진료를 받고 있는 환자만의 숫자다. 뇌전증은 자각 증상 없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는 데다 사회적 편견 탓에 쉬쉬하는 경우도 많아, 의료계에서는 국내 환자가 30만~5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뇌전증으로 진료받은 환자는 2015년 13만7760명으로 나타났다. 2010년(14만1천251명)과 비교해 2.5% 감소한 수치다. 남성 환자(2.6%)의 감소 폭이 여성 환자(2.2%)보다 약간 컸다.
뇌전증 환자가 소폭이나마 감소한 것은 소아와 노인에게서 뇌전증의 원인 질환이 감소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이준홍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신경과 교수는 “출생 전후 뇌 손상, 뇌 염증성 질환, 유전성 질환 등을 관리ㆍ치료하고 있으며, 노인들도 뇌혈관 질환(뇌졸중)이나 치매 등 퇴행성 뇌질환, 낙상 등으로 인한 뇌 손상 등을 적극적으로 치료함으로써 뇌전증 발생률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인구 10만 명당 환자 수는 남녀 모두 70대 이상과 10대ㆍ20대에서 가장 많았다. 특히 노인층에서는 뇌졸중이나 퇴행 질환이 늘면서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신상윤 기자/ke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