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착해야 한다. 섣불리 눈살을 찌푸리거나 화내면 ‘없어’ 보인다. 올해 펼쳐진 어처구니없는 디테일의 향연을 대하는 자세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XXX아, 니 매출이 어떻게 생겨나냐” 인터넷에 퍼진 3분짜리 동영상은 생생하다. 기내(機內)폭행으로 결박당해서도 승무원 얼굴에 침을 뱉고, 욕을 하는 ‘사이코’(문제의 인물을 제압한 미국 팝스타 리처드 막스의 표현을 그대로 옮김)의 말엔 디테일이 살아 있다. 돈 좀 있는 사람이란 걸 항변하면서도 ‘대접’ 해주지 않은 점을 보복하겠다는 행간도 읽힌다. 인적사항은 네티즌이 먼저 파헤쳤다. 부모 덕 없었으면 비즈니스석은 허락되지 않을 부류다.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 비선실세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SNS에 빈자를 꾸짖듯 휘갈긴 문장은 ‘기내 사이코’의 언행과 맞닿아 있다. 동지적 정신세계다. 선량한 기득권자는 억울하겠지만, ‘개인의 일탈’로 넘기기엔 이기주의에 절은 자들이 속출했다. 천박한 저들에게 분노하기보단 가정교육 부재를 동정하는 게 옳다.
‘10억원 vs. 6655만원’ 각오를 다져도 의연(依然)하기 쉽지 않은 숫자의 대비다. 앞의 것은 최순실 모녀가 독일 체류 7개월간 애완견 배변판 따위를 사는 데 들인 깨알같은 비용을 삼성전자가 대신 내줬다는 액수다. 삼성은 부인하지만, 의혹의 농도는 옅어지지 않는다. 뒷 숫자는 올 3월말 기준 전국 가구의 평균부채다. 내년엔 가계빚이 1500조원을 넘고, 연말엔 주택시장이 침체에 빠질 거란 전망도 있다. 콧구멍에서 단내 나게 뛰어도 ‘월급 로그아웃(월급받아도 카드값 등으로 곧장 빠져 나감)’ 처지에선 빚 탈출은 기약없다. 기득권을 해체하겠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커져도 이상할 게 없는 판국이다.
불평등한 한국을 둘러싼 보수와 진보간 한 판 승부는 불가피하다. 당장 더불어민주당이 전ㆍ월세 상한제, 상가 임대차 계약갱신 연한 연장(5년→10년) 등을 입법하겠다고 하자 갑론을박이 은근 치열하다. 셈법은 복잡하지 않다. ‘있는 쪽’은 더 벌 여지가 줄어들까 우려하고, ‘없는 쪽’은 덜 쓰게 해달란 거다. 관건은 ‘있는 자가 한꺼번에 가격을 올리면 더 큰 부담’이라는 부작용의 깊이가 얼마일 것이냐는 점이다. 검증없는 입씨름으로 허송세월할 공산이 크다. 다른 경제 이슈와 정치 쟁점들도 전선이 무한대로 확장하며 격돌할 거다.
나태했던 보수 정권과 포퓰리즘의 줄타기를 해 온 진보진영이 교집합을 찾아내야 한다. 실패하면 사회 구성원 모두 ‘눈 먼 자들의 도시’에 갇히게 될지 모른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 앞에서 노선과 진영에 집착하는 건 사치다. 이미 세상은 경계가 무가치한 시대로 접어들었다.
내년엔 ‘울혈(鬱血)사회’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다. 버티는 집권자와 추종세력이 파생시킬 어이없는 논리와 집착이 고비마다 터져 나올 게 확실해서다. ‘벚꽃대선’이든 더 늦어지든, 그 이후에도 삶은 변한 게 하나도 없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어디선가 ‘포용하는 있는 자’, ‘유능한 없는 자’의 싹은 트고 있을테니.
hongi@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