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경기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북크로싱데이’의 초청 강연을 위해 가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인데다 살을 에는 추위여서 문학 강연을 들으러 와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라는 염려가 앞섰지만, 행사 내용이 흥미로워서 현장이 궁금했다. 집에서 읽지 않는 책을 가져와서 기증하거나 원하는 책을 빌려본 후 간단한 서평을 적어 다음 달 ‘북크로싱데이’에 되돌려주는 행사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흔히 읽은 책들은 한동안 서재를 장식하다가 이사하거나 집을 정리할 때 버려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경기문화재단은 이런 경직된 독서 습관을 바꿀 의미있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필자가 이 행사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다른 이가 읽은 책을 받아 읽는 재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십 여 년 전에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의 ‘죽은 자의 사치’를 한 독자가 보내온 적이 있었다. 당시 책이 품절되어, “읽으면서 줄까지 치고 메모까지 남긴 책을 보내줄 수밖에 없어 미안하다”는 짧은 편지가 함께 들어 있었는데, 두고두고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책이 되었다.
또 다른 한 권은 지난 연말 폴란드에 머물 때 받은 책이었다. 폴란드는 1989년 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체결한 이래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지만, 크리스마스이브의 식탁에 필자를 초대한 가족은 과거 사회주의 시절의 바르샤바 모습도 한국작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 집의 대학생 딸이 예전에 선물로 받았던 책을 다시 필자에게 선물을 했던 것이다. 사진 속의 풍경들도 그렇지만 그 책의 운명과 여정이 소설가의 상상력을 많이 자극했던 것이다.
경기문화재단에 가니, 사람들이 하나 둘 가져다놓은 책들이 탁자 위에 진열되어 있었다. 중고 책들을 중고가게에 내놓거나 작은 도서관에 일괄 기증하는 경우와는 다르게, 자신이 기증한 책 한 권이 다른 이들의 독서를 유발하고, 서평까지 적혀 다시 돌아오는 과정을 지켜보는 온전히 새로운 독서의 여정처럼 보였다. 작가가 책을 출간할 때처럼, 그들도 책을 내놓고 다른 독자의 반응을 기다리게 될 것 같아 흥미로웠다. 그렇게 차가운 겨울바람을 뚫고 들고 온 한 권의 책을 내놓는 모습은 마치 꺼져가는 독서의 불길을 호호 불며 살려내려는 의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책을 기증한 사람들을 위해, 필자는 최근 출간한 소설 ‘바르샤바의 열한 번째 의자’에 대해 들려주었다. 95%가 카톨릭 신자인 폴란드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특별한 날일 수밖에 없다. 폴란드는 가정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식탁에 빈 의자를 하나씩 마련해둔다. 아기 예수를 맞이할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더러운 짐승의 밥그릇에 아기 예수를 뉘게 했던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집집마다 마련된 빈자리는 이제 크리스마스에 갈 곳이 없는 사람을 위한 자리가 되었다. ‘올지도 모를 사람’을 위한 자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강연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타인을 위해 자신의 서재에 한 권 두께의 빈자리를 만들어 두고 나온 이들이 아닌가! 그 생각이 들자, 듬성듬성 강연장의 빈자리도 허전하지 않았다. 아니 우리 사회 곳곳에 필요한 빈자리들을 보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