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슬기 기자] 보름 앞으로 다가온 새누리당 8ㆍ9 전당대회에서 이른바 ‘대권 잠룡’들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는 지도부가 내년 대선후보 경선을 책임지는 만큼 누가 당대표가 되느냐에 따라 자신의 대권가도를 다지는 발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김무성 전 대표와 오세훈 전 서울시장, 남경필 경기도지사, 원희룡 제주도지사, 유승민ㆍ나경원 의원 등은 물밑에서 각 당권주자의 교통정리에 나서는 한편, 강성 친박(親박근혜)계의 특정 후보 옹립 움직임에 강한 경고를 날리는 등 다방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윤상현ㆍ최경환 의원 등 ‘친박 핵심’의 공천개입 녹취록 파문 이후 “친박계가 다시 당권을 잡으면 정권 재창출은 불가능하다”는 위기의식이 퍼지고 있을 뿐 아니라, 비박(非박근혜)계가 당권을 접수해야 친박계의 일방적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 대선 후보 추대를 막을 수 있다는 점도 잠룡을 움직이게 하는 요인이다.
24일 정치권에 따르면 우선 김 전 대표는 최근 지지자 1500여 명과의 전대 승리 2주년 행사를 연 데 이어 전국 배낭여행, 중국 방문 등으로 활동 반경을 넓혔다. 그러면서 잇달아 비박(비박근혜)계 후보 지지를 공언했다. “비주류 성격의 후보들이 당을 혁신할 수 있는 성향의 사람이 있으니까, 그중에서 (한 명을) 밀겠다는 것은 당연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유 의원은 정병국 의원의 당 대표 경선 출마 선언문을 함께 작성하는 등 비박계의 당권 접수를 후방 지원하고 있다. 유 의원은 최근 “대선 도전을 깊이 고민하고 있다”고 한 바 있다. 전당대회 전선에서는 한발 물러났지만, 잠재적 대권주자로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일 전당대회 불출마를 선언한 나 의원 역시 이날 오전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전당대회가 계파 패권주의에 갇혀서는 안 된다. 친박계가 누군가를 또 밀어준다, 권력을 잡겠다는 순간 새누리당은 국민에게서 멀어질 것”이라며 친박계의 ‘홍문종 후보 옹립’ 사전 차단에 주력했다. 나 의원은 전당대회 불출마 선언 당시 “대한민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매진하겠다”며 대권 도전을 암시했다.
전ㆍ현직 지방자치단체장 3인방으로 꼽히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 남경필 경기도지사, 원희룡 제주도지사도 전대에서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비박계의 ‘단일화 메이커’로 나선 상태다. 총선 패배로 정치적 타격을 입고 100일 넘게 자숙한 오 전 시장이 이번 전대를 계기로 재기를 모색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오 전 시장은 지난 11일 비박계 당권 주자이자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정병국ㆍ김용태 의원을 만나 후보 단일화를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는 27일에도 자신이 당협위원장을 맡은 서울 종로에서 정 의원과 만날 예정이다.
남ㆍ원 지사는 현직 지방자치단체장으로서 선거 중립 의무를 지키고자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나 의원의 불출마 결단에 일정부분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원 지사는 지난 21일 광주에서 정 의원과 만나 당권 레이스에서 정 의원에 힘을 실어준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비박계 한 의원은 “청와대 핵심 멤버의 비위 사실이 연이어 드러나는 등 정국이 심상치 않다”며 “9월 국정감사에서 묵은 고름이 터지듯 폭로가 이어지며 정부와 여당에 불리한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4ㆍ13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 이반이 더욱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이라도 혁신 이미지를 가진 비박계를 당 전면에 내세우고, 친박의 자취를 지워야 당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친박계 일각에서 “대선 후보 경선을 최대한 미뤄 ‘반기문 대세론’을 고착화 하자”는 사실상의 추대론이 나오는 것도 비박계 일색인 잠룡들을 자극하는 요인으로 분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