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성훈ㆍ이수민 기자] 영국 경제학자 J. V. 로빈슨은 자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다른 나라 경제를 희생시키는 것을 ‘근린궁핍화정책(beggar-thy-neighbour)’이라고 표현했다. 이웃을 거지로 만드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중국이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의 혼란을 틈타 위안화를 평가절하시킴으로써 자국 경제를 부양하는 한편, 세계를 디플레이션의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브렉시트로 안전자산인 달러와 엔화 가치는 치솟고 다른 통화 가치가 추락하는 사이, 중국 당국은 시장의 패닉이나 자본유출 걱정 없이 위안화를 평가절하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이 8일 보도했다.

‘이웃을 거지로 만드는 정책’ 위안화 평가절하에 중국은 웃고, 세계는 울고

인민은행 산하 외환교역센터에 따르면 위안화 기준환율은 브렉시트 국민투표 당일인 지난달 23일 달러당 6.5658위안에서 8일 6.6853위안으로 보름 만에 1.8% 올랐다. 기준환율은 2010년 11월 이후 5년 반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주식ㆍ채권 시장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고 뚜렷한 자본 이탈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의 6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은 3조2100억 달러로 전달보다 200억 달러 늘어, 줄어들 것이라고 봤던 시장의 전망을 무색케했다. 이는 위안화 가치가 1.9% 하락했던 지난 1월 첫 주에 중국 증시가 폭락했던 것과는 무척 다른 모습이다. 중국은 위안화 가치가 크게 떨어질 때마다 증시가 폭락하거나 외환보유고를 줄여 환율 방어에 나서야 했는데, 그런 비용을 치르지 않아도 된 것이다.

시장의 관심이 브렉시트 이후 유럽 금융시스템의 붕괴 가능성에 쏠려있고, 중국 외환당국의 환율 결정 시스템이 이전보다 투명해졌다는 신뢰가 생긴데다, 중국 정부가 자금 유출 관련 규제를 강화한 것 등이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중국이 근린궁핍화정책을 진행하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중국 내에서는 공장출고가가 2.9% 하락할 정도로 철강, 선박, 화학, 제지, 유리 등 산업 전반의 과잉 생산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를 조정하려 하지 않고 위안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해외 수출을 늘려 자국의 산업 위기를 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철강 산업 분야는 중국이 어떻게 세계 경제를 왜곡하는 방식에 대한 생생한 증거다. 중국의 철강 생산이 전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최근 10년 동안 10%에서 50%로 껑충 올랐다. 현재 설비 과잉 규모가 3~4억톤에 달한다. 이는 EU 철강 산업 전체의 생산량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다. 중국 철강은 위안화 절하, 수출 보조금, 세금 지원, 신용 지원 등을 등에 업고 전세계 철강업계를 강타했다.

모건 스탠리의 한스 레데커 통화부문장은 “중국처럼 상대적으로 폐쇄된 자본계정의 경우, 이러한 환율 변동은 정책 결정에 따른 것이다”라며 “중국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경제 모델을 중시하며, 경쟁력 향상을 위해 위안화 가치 하락을 유도하고 있는 듯 하다”라고 했다.

이는 글로벌 디플레이션을 심화하는 문제를 낳고 있다. 세계 각국의 수입 가격은 지난해에 비해 일본 20%, 독일은 5.5%, 미국은 5% 하락했다. 유가가 다시 회복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면서 세계 각국의 국채 수익률도 뚝 떨어졌다.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스위스 -0.58%, 일본 -0.28%, 독일 -0.16%, 프랑스 0.14%, 영국 0.78%, 미국 1.4% 등이다.

문제는 중국의 경제 규모가 너무 커서 세계가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중국의 고정자산투자는 한 해 5조 달러로, 미국과 유럽을 합한 수준이다. 투자와 수출로 경제를 이끌어온 중국 경제가 방향 전환을 서두르지 않는 한 세계 경제 위기는 지속될 전망이다. 레데커 통화부문장은 “중국은 1990년대 일본과 같은 디플레이션 상황에 있지만 규모는 훨씬 크다”라며 “글로벌 경제는 이것을 흡수할 여력이 없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