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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 前대통령 “어려운 기자들 집 마련해 줘라”
이후락 “사글세 기자 많다”보고
기자들 이촌동 포기 이곳 선택
무주택자 3.3㎡당 2000원 매입



기자촌은 1960년대 말 어려웠던 한국 사회에서 한단계 발전한 마을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 충분한 마을 있었으나 지금은 과거의 흔적을 전혀 찾아 볼수 없고 단지 지명만 남아 있다.

기자촌은 말그대로 기자들이 집단으로 이주하면서 지어진 이름으로 집단 직업군 마을이었다. 이후 기자촌 아래쪽에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광복촌도 만들어 두 마을이 함께 했으나 마을이 형성되고 40년을 넘기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지금은 은평뉴타운의 이름으로 기자촌 아파트가 옛 이름을 대신하고 있으나 실제 기자들이 얼마나 거주하는 지는 알지 못한다. 

기자촌 초기 집들. 일부는 다시 짓거나 리모델링 했으나 초기집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기자촌은 196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집없는 기자들의 주거 안정을 위해 북한산 자락에 택지를 마련, 땅을 내줘 집단 주거지를 조성하게 하면서 마을 이름이 붙여 졌다. 공식적으로는 한국기자협회가 무주택 기자들을 대상으로 조합을 설립, 정부에서 마련해 준 국유지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진관외리(현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일대 18만1500㎡(5만5000평)에 조성됐다.
그러나 한 원로 언론인에 따르면 이런 이야기는 공식화 된 것들로 실제는 당시 경향신문 A부장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상당한 친분을 쌓고 있었는데 A부장이 “집도 없어 사글세를 사는 기자들이 많다”고 이야기 한 것이 기자촌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됐다.

이 이야기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 하자 박 대통령이 “임자가 알아서 기자들 집을 마련해 주라”고 했다고 했다. 이후 정부에서 이촌동과 현재 기자촌 터 두 곳을 제시했으나 한국기자협회에서 가격도 저렴하고 택지도 넓은 진관외리를 선택했다고 한다.

당시 조합원은 450여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3.3㎡당 2000원(이지역 밭 가격 3.3㎡에 3000원)을 주고 매입했으나 산비탈을 깎아 조성한 동네로 교통여건이 좋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특별히 싸게 구입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실제 1971년 입주했으나 비가 오면 온동네가 진흙밭으로 변해 걸을수 없을 정도여서 오후반이었던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동생이 학교를 가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우여곡절끝에 1971년 초 입주를 시작해 1974년 3월 입주가 끝났다.

이후 1970년대 말 부동산 투자 열풍이 불면서 일부가 기자촌을 떠났으며 우리도 1978년에 기자촌에서 조금 시내로 나와 갈현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기자촌 생활 8년을 마감했다.

이렇게 시작된 기자촌은 초기에 430여가구에 기자들이 살았으나 2007년 뉴타운에 포함되면서 철거될 당시에는 불과40여가구만 기자출신들이 거주했다. 

이진용 기자/jycaf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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