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실과 열주(列柱) 사이 좁은 퇴칸에는 엄숙하고도 신성한 공기가 머문다. 화려한 단청도 조각도 없다. 우리 옛 건축물은 애써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검박한 아름다움으로 천년의 명맥을 이어왔다.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말 그대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중 백제본기의 한 구절로, 백제문화를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되는 표현이지만 이는 한국 전통미학을 관통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종묘 정전의 동쪽 퇴칸. 배병우 |
서울 한복판, 종묘니 창덕궁이니 하는 옛 건축물들은 공기처럼 익숙해서 그 가치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익숙하다고 해서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는 사실조차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전통 건축물에서 건축의 미래를 찾고자 하는 전시가 열렸다. 삼성문화재단이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리움에서 마련한 ‘한국 건축 예찬-땅의 깨달음’전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건축 10곳을 통해 오늘날 그 의의와 가치를 되새기는 전시다.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지붕. 주명덕 |
해인사, 불국사, 통도사, 선암사, 종묘, 창덕궁, 수원화성, 도산서원, 소쇄원, 양동마을까지 전통 건축 10곳을 선정했다. 그리고 주명덕, 배병우, 구본창, 김도균, 김재경, 서헌강 등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 작가들이 이 건축물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창덕궁 영화당에서 바라본 부용지 설명. 배병우 |
전시는 대형 사진 작품들이 주축을 이룬다. 눈 내리는 합천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지붕(주명덕), 비에 젖은 창덕궁 인정전 돌마당(배병우) 등 자연에 스며든 옛 건축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숙천제아도 |
사진과 함께 고미술품도 어우려졌다. 조선 후기 문신 한필교가 1836년부터 1878년까지 42년간 자신이 거쳐간 임지(任地)를 15첩 화폭에 남긴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ㆍ하버드대 옌칭도서관 소장)’가 국내 최초로 공개됐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국보 249호ㆍ동아대학교 소장)’, 조선 후기 우리나라 전도인 ‘동국대지도(보물 1538호ㆍ국립중앙박물관 소장)’도 나왔다. 특히 가로 6m에 가까운 동궐도는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유례없는 대형 사이즈의 궁궐 그림이다.
동궐도 |
하늘, 땅, 사람을 존중했던 우리 선조들의 정신을 되새기고자 한 이번 전시는 단순히 전통건축 사료를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매체를 동원했다.
전봉희 서울대학교 교수와 서울대 건축사연구실은 해인사와 불국사 가람(사찰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이 어떻게 자연 지형을 활용했는지 연구하고 이를 건축 모형으로 보여줬다. 종묘제례 의식과 절차를 글과 그림으로 푼 ‘종묘친제규제도설‘ 병풍 옆에서는 종묘 건축과 제례악을 담은 5분짜리 영상을 3채널(박종우 감독 ‘장엄한 고요’)로 보여준다. 리움이 전시에서 활용하고 있는 인터랙티브 솔루션 DID(Digital Interactive Display)도 동원해 고서화를 고화질 화면으로 확대해 감상하도록 했다.
리움 관계자는 “천년 넘게 이어온 우리 건축의 핵심은 생태주의다.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을 끌어들이고 그 자연과 조화를 이뤄냈던 우리의 전통건축을 통해 21세기 건축이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고자 했다”며 전시 의의를 설명했다.
전시는 내년 2월 6일까지 이어진다. 일반 관람료는 5000원. 평일 20세 미만 학생들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amigo@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