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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승희 기자의 채널고정] ‘역전의 용사’ 황정음, 죽어가던 ‘로코’도 살렸다
김성진=진주에 진흙을 발라도 진주, 평범한 드라마에 숨을 불어넣는다 ★★

고승희=궁상맞지 않은 고단한 청춘…황정음이라 가능했다 ★★★☆

이혜미=콩트같은 상황들이 과하다싶은데 중독성 있네 ★★★

정진영=이 얼마만에 제대로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란 말인가. 황정음 반갑다! ★★★★



‘로맨틱 코미디’가 ‘흥행불패’이던 시절은 지났다. 케이블에서 시작해 지상파로 확장한 장르물이 야금야금 안방을 섭렸했다. 대형 사극이 꾸준히 제작됐고, 중년 여성을 겨냥한 주말드라마가 활개를 쳤다. 톱스타(현빈 ‘하이드 지킬 나’, 하지원 ‘너를 사랑한 시간’)를 앞세워도 ‘로코’는 지지부진했다. ‘로코’만으론 경쟁력을 잃자 여러 개의 장르를 한데 섞은 드라마(복합장르)가 쏟아졌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만으론 재미가 없어 외계인(‘별에서 온 그대’)도, 다중인격(‘킬미 힐미’, ‘하이드 지킬, 나’)도 등장했다. 급기야 귀신(‘오 나의 귀신님’)도 봤다.

한 지상파 방송사 드라마국 고위 관계자는 “먹고 사는 것도 팍팍한데 누가 사랑놀음에 판타지를 느끼겠냐”고 말했다. “남녀가 눈빛을 주고 받고 사랑하고, 코믹 요소로 재미를 섞는 똑같은 방식을 너무 우려먹은 결과”가 로코의 흥행을 보장할 수 없게 됐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소위 말하는 “웃기는 남녀상열지사”를 향한 싫증이 시청자 사이에 퍼졌다. 현재는 “강박적으로라도 새로운 장르를 추구하려는 시도”가 나오는 상황이다. 

이 와중에 대놓고 ‘로맨틱 코미디’가 등장했다. 아무 것도 섞지 않아 ‘과거 회귀적’이다. ‘기승전연애’로 향해가는 드라마다. MBC 수목드라마 ‘그녀는 예뻤다’ 얘기다. 드라마는 익히 봐왔던 그림으로 안방을 찾았다. 신분 감추기, 백조가 될 미운 오리 새끼, 뒤엉킨 사각관계, 진지하다가도 허당스러움을 버리지 못하는 과장된 캐릭터의 집합이다. 없으면 서운한 ‘재벌2세’도 나온다.

황정음 박서준 최시원 고준희가 남녀 주인공으로 이름을 올렸으나 첫 회 시청률은 가히 절망적이었다. 김태희 주원 주연의 ‘용팔이’가 20%의 벽을 넘으며 승승장구할 때 안방에 입성, 4.8%(닐슨코리아 집계ㆍ전국 기준)로 시작했다. 첫 방송 직후 ‘그녀는 예뻤다’ 관계자들은 “‘용팔이’의 벽이 그렇게 높은거냐”며 허탈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꾸준한 상승세로 방송 5회차에 10.7%를 기록했고, ‘용팔이’가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치고 나왔다. 8회 방송분은 14%대를 넘겼다. 한 물 간 줄 알았던 ‘로코’의 대반격이다.

세 배에 달하는 반등의 힘은 ‘팔 할’이 황정음이었다. 황정음은 이 드라마를 통해 또 한 번 ‘역전의 용사’로 거듭났다. 이미 두 편의 전작(‘비밀’, ‘킬미, 힐미’)을 통해 동시간대 대작(‘상속자들’, ‘하이드 지킬, 나’)을 제친 이력을 남겼다.

황정음은 드라마에서 작정하고 망가졌다. ‘꽃미모’를 내려놓으니, 급기야 “너무 못생겨서 채널이 돌아갈까”(황정음) 걱정도 했다. 하지만 반응이 다르다. 시청자는 배우의 연기에 몰입했다. “예능과 마찬가지로 드라마에서도 예쁜 척하는 연기보다는 의외의 모습이라 여길 만큼 망가지는 캐릭터의 인기가 높다. 배우들이 많이 망가지는 연기를 보일수록 열정적으로 드라마에 헌신한다는 느낌을 받는다”(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것이 황정음을 통해 증명됐다.

사실 드라마는 황정음이 ‘잘 하는 연기’의 연장선이었다. ‘비밀’(KBS2), ‘끝없는 사랑’(SBS) 등 절절한 드라마를 통해 황정음은 한동안 ‘눈물의 여왕’으로 군림했으나, ‘지붕 뚫고 하이킥’(MBC) 시절의 밝은 캐릭터는 황정음이 품은 비밀병기였다. ‘하이킥’의 조성희 작가와 다시 만난 것이 이 작품이다. 황정음은 드라마 기획단계부터 섭외 0순위였다.

‘그녀는 예뻤다’ 속 황정음은 한 때는 ‘모두의 첫사랑’이었다. 가세가 기울었고, 인생은 달라졌다. 고단한 현실을 전전하다 보니 외모는 엉망이 됐고, 스펙도 채우지 못했다. 주근깨 투성이에 구제불능 곱슬머리, 패션 센스도 빵점이다. 그 와중에 만난 직장 상사가 유년시절 첫사랑이다. 초라해진 현재의 모습에 찬란했던 과거를 숨기는 여주인공으로 인해 시작된 ‘숨은 첫사랑 찾기’가 이 드라마의 핵심이다. 시트콤 같은 가면무도회에 녹록치 않은 현실을 섞었다.

완벽하게 망가진 여주인공에게선 배우 황정음의 강점이 고스란히 발현된다. 섬세한 감정표현과 디테일한 행동으로 멜로와 코믹을 적당히 오간다. N포세대의 고단함을 건드리면서도 주눅들지 않는 평범한 여주인공은 현실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청춘의 또 다른 얼굴이라 공감대가 높다. 하재근 평론가는 “망가진 캐릭터로 인해 여성들에겐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고 말했다.

그 동질감은 ‘그녀는 예뻤다’가 주는 재미요소와는 별개로 드라마를 끌어가는 힘이다. ‘뻔한 공식’을 답습한 ‘로코’로 보이지만 이 드라마는 말랑말랑한 이야기 안에 특별한 화두를 던져놨다. “드라마 주인공은 왜 모두 예쁜 여자뿐이냐”(정대윤 PD)는 의문은 못생긴 여주인공이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계기였으나, 이 주인공은 꽤 상징적이었다. 1%의 특별한 사람들이 주목받는 사회에서 소외된 평범한 ‘주변인’의 이야기였다. “너만 주인공이냐”며 “나도 주인공”이라는 대사는 ‘그녀는 예뻤다’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황정음의 캐릭터가 부족함은 있을 지라도 보잘 것 없어 보이지 않는 이유다.

못생겨진 황정음은 이미 8회의 끝에 외모 변화를 예고했다. ‘못난이’ 여주인공의 변신은 어느 드라마에서나 극적이다. ‘그녀는 예뻤다’ 속 남자들은 외모가 아닌 내면을 볼 줄 아는 품격 높은 캐릭터인 탓에 멜로는 진작에 시작됐다. 그럼에도 확 달라진 외모와 그로 인해 달라진 멜로 구도, 남자 주인공(박서준 분)만 모르고 모두가 다 아는 숨은 첫사랑 찾기의 행보는 다음 회차를 기다리게 하는 요소다. 신들린 황정음과 나날이 성장하는 박서준, 능청스러운 최시원의 합이 워낙에 좋은 탓이다. 심지어 OST와의 궁합도 좋다. 황정음 박서준의 그림마다 흐르는 ‘음원 깡패’ 소유의 목소리(‘모르나봐’)는 죽어가던 연애세포도 살려놓는다.



고승희 기자/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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