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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PB 레전드 이야기] 노모 히데오 '토네이도 투구폼'의 배경 1부

[ 헤럴드 H스포츠=박승환기자 ] “메이저리그는 모든 야구 선수들의 꿈이다. 야구는 내 인생의 전부이며, 그 외에 내가 선택할 건 아무것도 없다.” 이 멘트는 ‘토네이도’ 돌풍으로 한때 일본과 미국 야구를 평정했던 ‘노모 히데오’ 가 남긴 말이다. 오늘은 ‘전설’ 노모 히데오가 살아온 파란만장한 일대기 알려보고자 한다.

유년 시절 오사카에서 야구공을 만지작거리던 노모 히데오의 아버지는 “니 폼은 팔꿈치에 무리가 많이 가는 투구폼으로 머지않아 팔꿈치가 망가지게 된다. 몸 전체를 이용하는 투구폼으로 개조해 보자.” 라는 제안을 했고 노모 히데오는 그 투구폼으로 일본과 미국 야구를 평정한 선수로 성장한다.
 
한국의 살아있는 전설 ‘박찬호’가 ‘놀란 라이언’을 벤치마킹하여 하이키킹 투구폼을 만들려 했던 것처럼 노모 히데오는 야구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아버지의 조언과 일본 야구의 전설 ‘에나츠 유타카’의 투구폼을 벤치마킹해 지금의 ‘토네이도 투구폼’을 만들었다. [에나츠 유타카(데뷔 2년차 25승 401탈삼진. 사와무라상 수상)는 통산 206승 158패 193세이브 방어율 2.49를 기록한 전설의 선수]
 
노모의 고향인 오사카에는 많은 야구 명문팀들이 존재했는데, 노모는 PL고등학교(요미우리의 간판투수 ‘구와타’와 세이부 황금시대의 주역 ‘기요하라’가 군림하고 있었다.)에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갔지만, “너 정도의 선수는 우리학교에 널렸다”며 퇴짜를 맞았다.
 
PL고등학교에서 퇴짜를 맞아 낙담한 노모는 무명 세이조우 공업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그렇게 노모는 세이조우 공업 고등학교로 진학하며, 모든 고교 선수의 꿈인 고시엔 진출은 못했지만, 고교 2학년 시절에는 ‘퍼펙트 게임’도 한차례 달성했다.
 
이렇게 고교 시절을 보낸 노모는 ‘독특한 투구폼’이 문제시되어 일본 프로야구로 진출에 실패, 고교시절 호흡을 맞췄던 사회인 야구팀 ‘신일본 제철’에 입단하게 된다. 일본 사회인 팀에 입단한 팀 동료에게 포크볼을 배워 점점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갔고, 88년 서울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참가해, 일본의 은메달 획득에 크게 공헌했다.
 
노모의 활약에 고무된 일본 프로야구계는 노모를 서로 얻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8개구단이 1순위로 노모를 지명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 끝에 ‘긴데쓰 버펄로스’가 노모를 데려가게 됐다. 노모의 영입에 실패한 요코하마는 투수 사사키 가즈히로, 야쿠르트는 포수 후루타 야쓰야를 데려가게 된다.
 
이렇게 어렵사리 프로야구에 데뷔한 노모는 데뷔첫해 18승과 탈삼진 287개, 방어율 2.91을 기록하며, 다승, 탈삼진, 방어율 1위와 신인왕, MVP, 사와무라상, 베스트나인을 거머쥐며 최고의 타이틀을 모두 휩쓸어 버렸다. 이후 노모는 입단 2년차 17승, 3년차 18승, 4년차에 16승을 달성, 4년 연속 다승왕과 탈삼진왕에 오르는 업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런 노모는 92년 미-일 올스타전을 통해 새로운 야구를 보고 ‘빅 리그’에 대한 꿈을 키웠고, 1995년 LA 다저스에 200만불의 헐값 계약을 맺고 메이저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 <2부에서 계속>
 
<사진=베이스볼 체널 공식 홈페이지 화면 캡쳐>

byyym360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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