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한상혁 ‘에이치에스에이치’

<K-패션을 만나다> ①한상혁 ‘에이치에스에이치’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2015 SS 서울패션위크 ‘에이치에스에이치(Heich es Heich)’ 무대.

느린 템포의 가요 ‘당신의 평화는 연약하다’가 흘러 나왔다. 그룹 보드카레인의 베이시스트 주윤화의 첫 솔로앨범 수록곡이다. 쿵쾅쿵쾅 클럽을 연상케 하는 강한 비트 일색의 여느 패션쇼 무대와는 다른 분위기, 국내 중견 디자이너 한상혁이(44)이 자신의 브랜드 에이치에스에이치로 처음 오른 서울컬렉션 무대였다.

[패션/메인] 면도날처럼 칼 같다, 부적격자들의 옷
한상혁 디자이너.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패션위크 이후 신사동 쇼룸에서 만난 한상혁은 “부적격자들이 갖고 있는 평화가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부적격자라니, 브랜드 심볼이 말해주듯 ‘면도날’처럼 칼같은 재단에 군더더기 없이 똑 떨어지는 수트로 소위 ‘강남스타일’의 표본과 같은 그의 옷들이 실은 부적격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건 납득이 되질 않았다.

“샤넬 백을 들고 여자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는 남자, 짝짝이 구두를 신은 남자, 외국인처럼 생겼는데 외국말을 못하는 남자 등등 독특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저마다의 사소하면서도 독특한 취향들이 제도권 안에서는 부적격인 것처럼 보여지죠. 좋은 직장을 박차고 나온 남자도 여기에 포함되고요.”

[패션/메인] 면도날처럼 칼 같다, 부적격자들의 옷
한상혁 디자이너.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좋은 직장을 박차고 나온 남자는 스스로를 두고 한 말이다. 한상혁은 지난 2008년부터 2013년까지 6년동안 제일모직 남성복 브랜드 ‘엠비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였다. 남성복 브랜드 ‘본’을 키운 성과를 인정받아 제일모직에 스카우트 됐던 당시 나이가 서른여덟이었다. 한국 패션계에서는 최연소 CD로 주목받기도 했다.

사실 그는 기업 브랜드 디자이너로 서울컬렉션에 15회나 참가한 베테랑이다. 그런 그가 국내 최고의 패션기업을 박차고 나와 부적격자를 자처했다.

“서울컬렉션을 K리그라고 본다면 K리그에선 우승도 해보고 최우수선수도 해 본 거잖아요. 이젠 EPL을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가고 싶은 시장과 기업 브랜드가 가져가야 할 시장이 달랐던 거죠.”

파리와 이탈리아 컬렉션까지 욕심을 냈던 디렉터는 결국 회사를 떠나 지난해 초 자신만의 브랜드를 런칭했다. 올해 2월엔 신사동에 쇼룸도 냈다.

[패션/메인] 면도날처럼 칼 같다, 부적격자들의 옷
한상혁 디자이너.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부적격’의 디자이너 한상혁은 패션 디자인에 있어서도 부적격의 철학을 드러냈다. 이는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이너의 시그니처를 고민하며 얻은 결론이기도 했다.

“모던한 톰 포드와 전위적인 마틴 마르지엘라를 다 좋아해요. 극과 극이죠. 그래서 제 옷은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그 안에는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있어요. 칼 같이 재단했지만 누구보다도 뜨거운 마음이 투영된 디자인이에요. 영화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가 빛과 어둠의 양면성을 갖고 있는 캐릭터인 것처럼요. 그게 제 역사성이기도 하고요.”

차가움과 뜨거움, 극과 극의 부적격 조화, 연약하지만 강고한 디자인. 그는 그냥 보면 기본 스트라이프 패턴의 코트지만 그 안에 들어간 재료나 테일러링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기법”이라고 말한다. 납작한 라펠(Lapelㆍ코트나 재킷의 앞몸판이 깃과 하나로 이어져 접어진 부분) 등도 그가 고안해 낸 방식이라고.

면도날처럼 칼 같다, 부적격자들의 옷

그의 부적격 디자인에 세계 패션계가 주목했다. 홍콩 하비니콜스, 파리 갤러리라파예트 관계자 등 해외 빅 바이어들이 쇼가 끝난 이후 그의 쇼룸을 찾았다. 현재 브랜드 단독 매장을 내기 위해 해외 쇼룸과도 접촉중이다. 국내 시장에서는 오는 FW 시즌을 맞춰 세컨드 브랜드를 출범시킬 예정이다. 브랜드가 아닌 디자이너 개인으로서는 아웃도어 브랜드 이젠벅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을 세 시즌째 이어가고 있다.

앞으로 무엇을 더 보여주고 싶은가를 물었다.

“예전에는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심오하고 심각했어요. 하지만 현재 패션계는 더 이상 그런 브랜드들로부터 위안을 받지 않아요. 밝고 명랑하고 즐거워야하죠. 저도 그런 부분을 보강할 겁니다. 그동안 서울패션위크가 재미없었다고요? 제가 없어서 그랬을걸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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