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양대근ㆍ강승연 기자] #. 1997년 한보그룹 비리 사건에서 정태수 전 회장 일가는 수천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당시 비자금과 뇌물을 상징하는 단어는 ‘사과상자’였다. 정 전 회장은 사과상자에 1만원권 지폐를 가득 넣어 시중은행장과 정ㆍ관계 인사들에게 돌린 것으로 유명하다. 사과상자를 꽉 채우면 약 2억4000만원이 들어갔는데 이 사건이 세간에 알려진 이후부터 골프 가방ㆍ007가방 등 새로운 수법의 뇌물 문화가 생겨나기도 했다. 포스코건설을 신호탄으로 비리 의혹 기업에 대한 검찰의 사정(司正) 한파가 한층 매서워지고 있다.
수사선상에 오른 포스코건설과 동국제강, 경남기업, 일광건영 등은 그룹 총수 또는 고위 경영진들이 100억원대 안팎의 비자금 조성 혐의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하지만 비자금 규모는 과거 수천억원대에 달했던 한보나 신동아그룹 등에 비하면 10분의 1수준으로 줄어든 것이다.
이를 두고 소액화ㆍ해외 은닉 등 최신 ‘비자금 트렌드’를 반영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30일 수사당국과 재계 등에 따르면 포스코건설을 비롯해 경남기업ㆍ동국제강 등 현재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대기업들의 비자금 조성 액수는 각각 100억원에서 3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모두 국내보다는 해외를 적극 활용해 비자금 조성에 나섰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포스코건설의 경우 베트남에서 하도급업체에 대한 리베이트를 통해 100억원대의 비자금이 조성됐고 이 중에서 약 40억원이 국내로 흘러 들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경남기업은 베트남과 국내외 계열사 등을 통해 대금을 부풀리는 수법으로 수백억원대의 부외자금을 형성한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 28일 검찰이 압수수색한 동국제강 역시 장세주 회장이 미국 법인을 통해 110억 원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의심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100억원대가 기업 비자금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해외 각지에서 계좌를 분산하는 수법으로 비자금이 조성되기 때문에 추적이 쉽지않고, 걸려도 큰 금액이 나오기는 어렵다고 지적한다.
검사 출신의 김경진 변호사(법무법인 이인)는 “해외 비자금 의혹을 밝혀내려면 금융 계좌를 추적해야 하는데 쉽지만은 않다”며 “미국과 지난해 조세정보자동교환협정을 체결하긴 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스위스 등 세계적 조세피난처까지 수사당국이 전부 들여다보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박상융 변호사(법무법인 한결)도 “비자금 액수가 실제로 증감됐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면서도 “검찰에 적발된 비자금 액수가 소규모화 되는 것은 금융정보분석원(FIU)의 출범으로 유관기업에 대한 감시가 강화됐고, 미국과 형사사법 공조가 가능해진 점 등이 주요 이유”라고 꼽았다.
실제로 최근 수사를 받고 있는 대기업들은 FIU가 수상한 자금 거래를 포착하거나 국세청 세무조사에서 비리가 드러나 검찰에 고발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5만원권의 등장 등을 계기로 비자금 조성이 용이해지고 기존에 없던 새로운 수법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최근 모뉴엘 사건에서 티슈 상자에 5만원 권을 수천만 원씩 넣어 뇌물로 전달한 수법이 대표적이다.
연예인 클라라와의 ‘카카오톡’ 논란으로 잘 알려진 이규태 일광공영 회장은 교회를 활용해 비자금을 마련했다. 그는 지난 2009년 불곰사업 당시 중개수수료로 받은 80억원을 교회 기부금 형태로 세탁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바 있다.
특히 이번 수사과정에서 이 회장이 자신의 사무실 책장 뒷편 9.9m²(약 3평) 남짓한 비밀 공간과 도봉산 인근 컨테이너 야적장을 통해 비자금을 관리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 회장 사무실 책장 뒷편 비밀 공간은 비밀번호 잠금장치가 설치돼 있고, 입구엔 감시용 폐쇄회로(CC)TV까지 달려 있었다.
김 변호사는 “재벌 총수들의 해외 비자금 조성ㆍ은닉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이뤄졌지만 정부는 2009~2010년에서야 역외탈세의 심각성을 인식했다”면서 “빠르게 발전하는 기업들의 비자금 수법을 정부가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