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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즘-최상현]김영란법과 ‘사도법관(使徒法官)’
‘김영란법’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했다. 그런데 곧 위헌 논란으로까지 확산되면서 결국은 헌법재판소의 심판대에 올랐다.

부정한 청탁하지 말고 뇌물이나 돈 주고 받지 말라는 이 법은 ‘벤츠 여검사’, ‘스폰서 검사’ 등 검찰의 부패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발단이 됐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법으로도 법조계 뇌물 비리를 척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거라는 회의론이 나온다.

법 시행으로 검찰의 수사권만 무소불위로 커지는 꼴이 돼 법조계 비리 관행에 제대로 메스를 대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그것이다.

이런 우려 속에 새삼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지난 50~60년대를 살았던 한 법조인의 삶이다. 다음 주면 그가 사망한 지 50주기가 된다. 올해는 그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는 ‘수인(囚人)들의 아버지’, ‘빈자(貧者)들의 법관’, ‘사도법관(使徒法官)’으로 불린다. 1940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후 1945년 서울지검 검사로 임용된 그는 이어 판사로 일하면서 대법원 판사(지금의 대법관)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의 삶은 부정부패와 뇌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늘 허름한 양복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사적인 용도로는 관용봉투나 관용종이도 쓰지 않았다. 관용차도 타지 않고 걸어서 출근했다.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자신의 삶에 지장을 준다며 처가에서 보내준 쌀가마니를 되돌려 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가 하면 봉급의 대부분은 형편이 어려운 사형수 가족을 돕는 데 썼다. 죽은 뒤에도 가난한 죄수들과 함께 했다. 지난 1965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는 가난한 사형수들 묘지 근처에 묻혔다.

요즘 흔한 막말 판사와도 달랐다. 그는 피고인들 위에 군림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높이에 맞춘 재판을 했다.

기독교와 불교를 거쳐 가톨릭에 귀의한 그는 평생 동안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재판의 철학으로 삼았다. 늘 인간이 어떻게 같은 인간에게 형벌을 내릴 수 있는 지를 고민했다.

선고 후에는 피고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도 한계를 지닌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이런 판결을 내리게 돼 무척이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판결에 불만이 있다면 매우 죄송하고 용서를 빌겠습니다.” 때문에 그의 판결에 불복하는 피고인보다 눈물을 흘리며 선고 내용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전해진다.

사법 불신이 팽배한 이 시대엔 법원의 판결을 수긍하지 못하는 게 일상이 돼 버렸다. 법조계의 뇌물 관행은 일년에도 몇 번씩 터져 나오는 데 처벌에는 인색하다. ‘김영란법’에도 법조계만은 ‘무풍지대’로 남을 거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대법원은 오는 16일 그를 기억하는 법조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김홍섭 선생을 기리는 추모행사를 연다고 한다. 가슴으로 그를 좇는 자리가 ‘세리모니’로만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sr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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