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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00승, 절반은 가족의 힘”
프로농구 사상 첫 500승 대기록…모비스 유재학 감독
기러기 아빠 500승 하던 날
아내·딸 축하전화에 눈시울

모비스 전신 기아에서 선수생활
뛰었던 팀에서 감독생활 자부심
“기억에 남는 최고선수는 양동근”



400승때까지는 담담한 듯 보였다. 하지만 500승이라는 숫자가 주는 묵직한 의미때문인지, 평소와는 달리 살짝 목소리가 떨렸다.

15일 강호 서울 SK를 상대로 프로농구 사상 첫 500승을 달성한 울산 모비스 유재학(52) 감독. 축하인사를 건네자 “고맙다. 그동안은 승률이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이번엔 첫 500승이라고 하니 기분이 좀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500승은 여간해서 이루기 힘든 숫자다. 한 시즌 54경기씩 치르는 한국프로농구에서 매년 전승을 거둔다해도 10년이 걸리고, 50퍼센트 승률이라면 20년이 걸린다. 현재 감독 최다승 2위는 유 감독과 절친한 친구인 전창진 KT감독(423승)이다. 전 감독이 지도자 출발이 조금 늦었다.

유 감독은 용산중-경복고-연세대 출신으로 연세대 코치를 거쳐 프로출범 당시 인천 대우 제우스 코치로 출발했다. 2년만에 감독이 됐고 17년째 감독을 맡고 있다. 유일하게 프로원년부터 지도자를 하고 있는 인물. 대우-신세기-전자랜드에서 힘겨운 6강싸움을 하며 싸움기술을 터득해, 모비스로 둥지를 옮긴 뒤 지도자로 만개했다. 벌써 11년째. 대표팀 감독까지 역임하며 ‘만수(萬手)’ ‘국민감독’이라는 애칭까지 얻었다. 


유 감독에게 500승의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힘은 가족이다. 기록의 절반은 가족 덕분”이라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곱씹어 보면 수긍이 된다.

유 감독은 많은 농구감독들처럼 기러기 아빠다. 그것도 무려 14년차. 2001년 가족(아내 김주연씨와 1남1녀)이 미국으로 떠났고 비시즌에만 잠시 만나는 생활을 14년째 이어가고 있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1년에 길어야 두달, 대표팀이라도 맡은 해에는 열흘 정도가 고작이었다.

유 감독은 “나야 선수들 가르치고 작전짜고 게임하다 보면 1년이 간다. 하지만 아내는 머나먼 타국에서 아빠도 없는 상태에서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줬다. 그런 아내가 없었다면 내가 경기에만 전념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좋은 성적을 내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500승을 달성한 15일 밤, 아내와 딸은 휴대폰으로 축하전화를 하면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아빠인 유 감독은 자신이 챙겨주지 못하는 동안 아이들을 잘키워준 아내와 탈없이 잘 커준 아이들에게 고마웠고, 가족들은 홀로 한국에서 매일 피말리는 승부를 하며 500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아빠와 남편이 마냥 애틋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간해서 속을 내보이지 않는 ‘내성적인’ 유 감독은 주변에 아주 가까운 사람 말고는 가족 얘기를 잘 하지 않는다. 평소 만만찮은 입담의 소유자로 농구관계자와 언론들에게 재미있는 사람으로 비쳐지지만, 낯가림도 있고, 호불호가 굉장히 분명해 깍쟁이같은 이미지도 있는 게 사실이다. 대신 이런 성격은 쓸데없는데 열정과 시간을 소비하지 않게 해준다. 이것이 11년간 모비스를 명문으로 이끌고, 자신도 뛰어난 지도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해줬다. 


유 감독은 실업농구 최강이었던 기아출신이다. 모비스의 전신이 기아. 부상으로 일찍 선수생활을 마감했던 유 감독에게 모비스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유 감독은 “모비스가 기아와 연속선상에 있는 팀이라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다. 기아출신이기 때문에 더 의미를 두게 되는 것 같다. 부산에서 울산으로 연고지를 옮기긴 했지만 내가 뛰었던 팀에서 감독을 하고 있고, 좋은 성적을 낸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유 감독이 500승을 거두는 동안 많은 선수들이 그를 거쳐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 한명을 꼽아달라고 했다. 웬만해서 선수 칭찬 안하는 인색한(?) 사람이지만 의외로 금방 털어놨다. “양동근이다.” 양동근은 유 감독과 오늘의 모비스를 함께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4년 유 감독 부임 직전, KCC로부터 신인지명권을 넘겨받은 모비스가 양동근을 지명한 상태였다. 거의 동시에 모비스맨이 됐다. 성실함, 승부근성, 철저한 자기관리까지 여러 면에서 유 감독과 양동근은 흡사하다. 벤치에서 유 감독이 생각하는 움직임은 텔레파시처럼 양동근에 의해 코트에서 구현된다. 오죽하면 양동근을 ‘코트의 만수’라고 할까. 유 감독은 “동근이는 팀의 막내에서 맏형이 될 때까지 단 한번도 딴 생각하지않고 성실히, 그리고 혼심의 힘을 다해 게임을 뛴다. 그런 선수를 데리고 농구를 할 수 있다는 것도 행운이다”라고 말한다. 아직도 가끔 선수시절을 떠올릴 만큼 조기은퇴에 대한 아쉬움을 속으로 품고 있는 유 감독으로서는 34세의 나이에도 씩씩하게 코트를 꿈꾸는 양동근을 자신의 ‘아바타’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 감독의 다음 목표는? “내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계속 감독을 할 생각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다면 농구장 근처에 오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감독을 떠난다면 뭘 할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유 감독에게 올해는 뜻깊은 해가 될 것 같다. 500승이라는 기념비적인 기록을 세운 것과 함께 14년간 떨어져 살았던 아내가 올해부터 한국에 들어와 함께 지낼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제 외로움은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걱정할 아내의 눈치를 보느라 좋아하는 술은 전보다 많이 줄여야하겠지만….

김성진 기자/withyj2@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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