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500년동안 영속한 장수 국가였다. 그 비결중 하나로 왕위계승 전쟁이나 쿠데타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이 꼽힌다. 예(禮)와 의(義)를 중시하는 성리학의 토대 위에 세워진 나라답게 조선의 왕들은 대부분 권력 남용과 인간적 오만을 경계했다. 민심을 하늘의 뜻으로 아는 민본 사상이 통치의 근간이었기에 군주들의 정통성이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역사적 평가에 대한 겸손함도 이씨 왕조의 미덕이었다. 왕들이 당대에 자신의 치적을 왜곡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관들이 기록하는 사초(史草)의 열람은 엄격히 금지됐다. 사초에는 임금의 언행이나 국정논의 과정, 사간원의 진언, 외교관계 등이 담겼다. 후대 임금은 전임 왕때 기술된 사초들을 종합해 실록을 편찬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선왕조실록’은 과거를 투영해 현재를 바라볼수 있게 하는 세계적 문화유산이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이 최근 ‘대통령의 시간’이라는 회고록을 출간해 논란이 일고 있다. 퇴임후 2년이 채 안됐는데 너무 빨리 내놓은게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자기 합리화와 자화자찬 일색의 내용도 시비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재진행형인 남북 관계에 영향을 미치거나 중국 등의 불쾌감을 유발할만한 내용을 담은데 대한 우려도 나온다.
한 저명학자는 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퇴임후 회고록을 통해 역사의 기록을 남길때 세가지를 유의한다고 소개했다. 먼저 국가 정상간 오간 내용은 상대국가의 입장을 존중하고, 둘째로 국가 이익을 고려하며, 마지막으로 회고록에 등장하는 제 3자 개인의 명예도 훼손하지 않으려 조심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시간’에는 남북간 정상회담을 위한 조건이나 북한 당국자들을 만났을 때의 상황 등이 상세히 언급돼 있다. 언젠가는 밝혀질 이야기지만, 후임 박근혜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남북 관계를 풀어야 할 시점에서 이를 공개하는 것이 과연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다.
이 학자는 그런 점에서 MB는 국가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공인의식보다 자신의 정책이 잘못됐다는 비판에 억울해하며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조급함 때문에 회고록을 일찌감치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왕조시대에도 볼 수 없었던 당대 평가의 오만함이 엿보인다고 비판했다.
회고록 출간은 MB 정부에 대한 실증적 평가를 시작하는 도화선으로 작용할 것이다. 회고록에 담긴 내용 뿐 아니라 글의 방향을 통해서도 그 시대를 계량할 수 있다. ‘대통령의 시간’은 이명박 정부를 분석하는여러 사초중 하나인 셈이다. 자기 합리화로 가득찬 자서전을 제대로 해독하고 재조명하는 것은 온전히 국민과 후세의 몫이다. 자원외교에 대한 국정조사가 예정돼 있지만, 비판에 머물지 않고 전 정부의 공과(功過)를 평가해 교훈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사족이지만 이 참에 전임 대통령의 회고록 발간 시기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감히 제안한다면 정치ㆍ외교ㆍ국방 등의 현안은 내부적으로 다음 정부에 빠짐없이 전수하되, 회고록은 차차기 정부의 출범 직후에 내놓는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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