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여든 나이가 되던 해 어머니는 치매 진단을 받으셨다. 평소 똑 부러지셨던 분이 불과 두 세시간 전 일을 잊으시고, 간혹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 게 이상하다싶어 병원을 모시고 갔더니 치매가 시작된지 한참 전이라고 했다. 그 뒤 처방을 받고는 있지만 어머니는 해가 갈수록 기억력이 감퇴하신다. 4남 1녀 형제 중 막내인 필자를 가장 예뻐하셨는데, 1년 전부턴 아예 필자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셨다. 치매란 것이 원래 가장 최근 기억부터 잊게 되는 병이라지만 형제중 유독 내 이름만 잊으신 게 서운했다.
‘내리사랑’이라고. 사실 잘못은 내게 있었다. 어릴적 그렇게도 끔찍히 사랑을 받았지만, 출가해 서울에 자리잡은 필자의 문안 인사는 점점 뜸했다. 불과 한 시간여 거리인 인천 본가를 찾는 일이 일주일에 한번에서 한 달에 두 번, 3주에 한번으로 줄었다. 찾아뵙지 못할 적엔 전화로 일주일에 두세 번 안부 인사를 여쭸지만, 요샌 일주일에 한 번 전화를 드릴까 말까할 정도가 됐다. 예전엔 이런 불효가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전화를 걸어 혼쭐을 내시곤 했다. 서글픈 건 이제 어머니는 그런 꾸지람도 없다. 치매란 몹쓸 병은 어머니 기억에서 막내의 존재를 계속 지우고 있다.
며칠 전 본가를 찾았다. 필자를 보자마자 어머니는 반색을 하시며 “막내가 왔구나” 라며 맞아주셨다. 그러다 잠시 뒤엔 “우리 막내와 닮았다”, “누구시더라” 하시며 오락가락 하셨다. 세월 앞에 무릎을 꿇으신 어머니를 지켜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놀아운 건 반전이었다. 어머니는 형제들이 한 자리에 모인 밥상 앞에서 대뜸 내게 “자네는 요즘 사는 게 어떤가”라고 물으셨다. 무심결에 “사는 게 쉽지 않네요”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슬로 슬로 퀵퀵입니다”라고 하셨다. “바쁘게 살다가 한가해질 때가 있고, 오르막 길이 있으면 내리막 길도 있는 법이니 조급해 하지 말고 살라는 얘기입니다요”라고 부연설명까지 곁들이셨다. 이 모습을 지켜봤던 형제들 눈이 모두 동그래졌다. 그리고 아주 잠시동안 예전의 그 분으로 돌아오신 어머니에 형제들은 감격했다.
영화 ‘국제시장’이 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몰이 중이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꾸준히 극장문을 두드린다. 한국전쟁 피란세대라면 누구나 겪었을법한 그저 그렇고 그런 얘기에 온 국민이 빠져드는 이유는 뭘까. 과거에 대한 향수,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우리 부모세대의 헌신적인 삶에 대한 공감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역설적이지만 지난 30년 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경제적 어려움과 각박해진 삶의 덕분인지 모른다.
고속 성장가도를 달리던 한국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서 좀체 빠져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비관론자들은 한국경제가 지금껏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련기를 맞게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빠르게 찼던 스텝을 리듬에 따라 느리게 바꿔야할 때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앞만 보고 달리던 우리사회가 지금 뒤를 돌아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휴머니즘의 회복이다. 리듬을 거스르면 스텝이 꼬이고, 댄스는 엉망이 된다. 때를 기다리면 퀵퀵 찰 순간이 오게 돼 있다. 그러는 동안 잃었던 인간성과 가족애, 인류애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is@heraldcorp.com